엄마, 미술관 놀러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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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아이들이 있는 미술관의 여름풍경-. 작품을 걸어두고 관람객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미술관엔 요즘 아이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방학을 맞아 어린이를 위한 각종 기획전이나 작가와의 만남 행사도 열린다. 미술관이 '지겨운 장소' 가 아닌 '훌륭한 놀이터' 로 변신하는 것이다.

'무서운 경비 아저씨는 나를 째려보고 엄마는 자꾸 조용히 하라고 야단친다. 한바퀴 둘러본 것 같은데 뭘 봤더라? 아, 그 이상한 세모.네모 그림이 생각난다. 엄마는 아주 비싼 그림이라고 나에게 설명해줬다. 하지만 내가 저번에 유치원에서 그린 동그라미 그림이 훨씬 멋지다. 놀이공원에 간 민지가 부럽다…' (초등학교 2학년 주현이의 일기-미술관에 갔다)

이런 내용이 아이 일기장에 씌어 있다면 당신은 이미 '신식 엄마' 가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미술 작품이라 해도 부모 손에 이끌려 할 수 없이 보는 그림이 좋을리 없다.

그렇다고 거창한 미술관으로 직행하지 말자. 대신 건물 한켠에 자리잡은 미술교실에 눈을 돌려보자. 서울이나 서울 인근의 미술관들이 어린이를 위한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준비해 놓고 있다.

"와, 이 냉장고 너무 낡았다. 우리가 새 것처럼 변신시켜줄까?"

"선생님, 저는 꽃무늬 냉장고를 만들고 싶어요. " "얼음 나오는 곳이 많아야 해요. 냉장고도 똥을 눠야 되니깐. "

미술용 앞치마를 두른 5~6세 꼬마들의 주문이 쉴새없이 쏟아진다.

"자, 우리 다같이 냉장고를 꾸며보자. 각자 원하는 위치로!"

한시간 넘은 진통 끝에 문짝 두개짜리 중고 냉장고가 새로운 개념의 '엽기적인' 냉장고로 변했다.

지하 작업실에서 벌어진 아이들의 냉장고 대변신 작전은 한편의 전위예술을 보는 것 같았다.

그 흔한 비너스 조각상과 견본 그림조차 없는 작업실에선 동동갤러리의 신개념 미술 수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움직이는 아이들' 이라는 뜻의 동동(動童)갤러리는 어린이만을 위한 전문 미술관이다.

1주일에 한번씩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무료로 전시장을 개방하고 있다.

강사 겸 큐레이터인 윤지영씨는 "보고 따라하는 미술 교육의 틀을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면서 창의력을 무럭무럭 키워준다" 며 "아이들이 만든 작품으로 갤러리에서 전시회도 갖는다" 고 자랑했다.

동동갤러리가 지난해부터 시작한 '일요일에 하는 미술놀이' 는 소형 트럭에 직접 그림그리기.찰흙으로 내마음 표현하기.과자로 집짓기 등 매회 각기 다른 주제로 수업을 진행한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바탕골예술관은 1년 내내 어린이를 위한 미술 프로그램으로 가득하다.

도자기 공방과 공작실에서 직접 작품을 만들어보면서 '예술이란 어려운 게 아니구나' 라는 자신감을 키워준다.

지난주 말 이곳에 들른 김유선(35.주부.서울 강남구 개포동)씨는 "아이와 함께 가족컵을 빚으면서 도예가가 된 기분이었다" 며 "작품을 만든 뒤 잔디밭에서 도시락을 먹는 것도 재미있다" 고 말했다.

공작실은 ▶연필꽂이.CD장 등을 만드는 목공예반▶앞치마.가방.티셔츠를 직접 만드는 섬유반▶고무판화로 카드.액자를 만드는 판화작업반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천연 장작 가마를 설치한 도자기 공방에서는 흙을 이용해 손도장을 찍고 물레를 직접 돌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미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술의전당도 유아 미술교실.창작 미술교실 등 연령별로 다양한 미술 수업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염색.판화.도예를 비롯, 흙놀이.사진찍기.가면만들기.스테인드글라스 등 분야도 다양하다.

올 여름 방학을 위해 마련한 '여름미술학교' 는 오는 27일부터 개강하며 현재 접수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엄마랑 나랑' . '미술관이랑 나랑' 프로그램은 국내 최고 미술관의 명성에다 수강료가 없기 때문에 몇달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으악~" "악~" "꺄아~. "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괴성이 들린다. 엄마와 함께 이곳에 온 소연(5)이도 귓가에 두손을 대고 힘껏 소리를 지른다.

"저는 지금 절규하고 있는 거예요. " 소연이는 다름 아닌 뭉크의 '절규' 라는 그림을 보며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연이 엄마는 "미술책을 들여다 볼 때는 지루해하던 아이가 그림을 보고 직접 따라할 땐 생기가 돈다" 며 "체험식 감상을 통해 작가와 그림에 대해 스스로 이해를 하는 듯하다" 고 뿌듯해 했다.

이렇듯 삼성어린이박물관 아트갤러리의 전시작들은 모두 진열장을 뛰쳐나와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직접 만지고 따라해 보는 체험식 전시물들이어서 미술에 대한 거부감을 날려버릴 수 있다. 이곳에선 중세 유럽의 화가로 행세하며 배를 타고 그림을 그리고 그림 속 발레리나처럼 멋진 포즈를 취해보기도 한다.

동동갤러리 전시장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전시물을 배치하고 있다. 출입구에 있는 10m 길이의 미끄럼틀을 타고 전시장으로 들어가면 모든 그림들이 아이들 바로 앞에 나타난다.

함께 곁들이는 설명도 이해하기 쉽다. 가령 '연못' 이라는 작품을 설명할 땐 일단 아이들에게 연못에 대한 생각들을 말하게 한다. '작가의 연못' 과 '내 연못' 의 차이를 발견하는 순간 작가의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어린이 미술관' 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미술관 건물 2, 3층에 있는 어린이 전시실은 유리벽 복도를 통해 안과 밖의 전시물을 살펴 볼 수 있는 입체 공간이다.

호암갤러리는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어린이 아틀리에' 를 열고 작품 감상과 실습을 병행하는 프로그램(1인당 7천~8천원)을 운영하고 있다. 02-750-7859.

[아이와 미술관 둘러보기]

▶미술관 방문 전에 아이와 함께 관람 계획을 짜본다.

아이들은 계획 단계에서부터 참여할 때 흥미를 갖는다. 인터넷이나 관련 서적을 참고해 전시회 관련 정보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또 아이에게 관람할 때의 예절을 미리 알려줘야 한다.

▶옷은 간편하게 입히고 소지품은 간단하게 챙겨주자.

오래 걸어다녀야 하는 만큼 번거롭지 않게 해줘야 한다.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도 집에 놓고 가도록 한다.

▶집에 와서는 아이에게 무턱대고 감상문을 써보라고 강요하지 말자.

대화를 나누며 감정을 교류하는 것이 좋다. 전시장에서 가져온 팸플릿이나 자료를 펴놓고 설명.퀴즈.만들기 등을 같이 해보며 정리의 시간을 가지면 효과가 높다.

글〓박지영 기자

사진〓안성식, 그래픽〓박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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