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대일결의안도 채택 못한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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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 거부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앞두고 국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가운데 국회가 대일(對日)규탄결의문을 채택키로 했지만 심의조차 하지 못한 채 회의 자체가 무산돼 버렸다.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여야가 모처럼 머리를 맞대고 한 목소리를 내겠다는 '기특한' 다짐을 한 바로 그날 사소한 의사 절차 시비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를 공전(空轉)시켜 결의문 채택을 오는 18일로 넘기는 좀팽이 정치를 했다.

일본이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시정하라는 우리의 이성적이고 정중한 요청을 거부한 데 대해 국민이 분노하고, 정부가 강경대응 방침을 속속 내놓고 있다. 언필칭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라면 제백사(除百事)하고 정부보다 한발 앞서 국민의 결집된 의사를 모아 일본 정부에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밝히는 것이 도리요, 의무라고 본다.

그러기에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던 여야도 대일 규탄결의문을 채택하자고 합의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 판인데 무슨 의사일정과 관련한 자잘한 이견(異見) 때문에 외통위를 공전시켜 결의문 채택조차 하지 못하고 그도 모자라 여야가 그 책임공방까지 벌이고 있으니 차마 눈 뜨고 못볼 일이다.

무엇보다 일본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는가를 생각하면 등에 식은 땀이 날 지경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일부 시각은 이미 우리 정부의 대일 강경자세를 대(對)국민용이며, 얼마 가지 않아 슬그머니 수그러질 것이라고 보고 있지 않은가.

여야가 내정문제로 다툼이 치열하더라도 일단 국익이 날카롭게 걸린 외치문제가 생기면 한마음으로 대응하는 슬기와 금도(襟度)를 보이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 하겠다. 하물며 20세기 전반기 우리를 유린했던 일본이 우리 민족의 자존과 자긍심을 또다시 짓밟고자 획책하는 사안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국회무용론.국회공해론은 이래서 나오는 것이다. 여야는 당장 외통위를 열어 결의문을 채택하고, 우리 국민의 정당하고도 당당한 의사와 자세를 일본측에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 정쟁(政爭)을 덮고 국익을 위해 헌신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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