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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6번째 시집 '풍경뒤의 풍경' 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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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도시와 사람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계절, 이미 자연으로 돌아가 이제 사람들이 조금씩 그리워지기 시작한 시인이 있다. 3년여 전 최하림(崔夏林.62) 시인은 충북 영동 산골로 들어갔다.

선경(仙境)같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자연과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며 최근 6번째 시집 『풍경 뒤의 풍경』(문학과지성사.5천원)을 내놓았다.

자연을 소재로 많은 시들이 쓰여지고 있다. 그런 시들 중엔 자연을 너무 예찬한 나머지 우리의 현실이 쏙 빠져버린, 마치 옛날 이발소에나 걸렸을 값싼 풍경화 같이 자연에 아부하는 시들도 많다.

반대로 시인의 감상이나 현실로 자연을 덧씌워 자연 자체를 왜곡.훼손해 버리고만 시들도 많다. 그러나 『풍경 뒤의 풍경』에 실린 50여편의 최씨의 시들은 햇빛과 사람이 동시에 그립다며 자연과 인간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 긴장이 단순한 풍경 뒤에 있는 삶의 속내를 읽게 만든다.

"억새풀들이 그들의 소리로 왁자지껄 떠들다가//한 지평선에서 그림자로 눕는 저녁, //나는 옷 벗고 살 벗고 생각들도 벗어버리고//찬 마루에 등을 대고 눕는다 뒷마당에서는//쓰르라미 같은 것들이 발끝까지 젖어서//쓰르르 쓰르르 울고 있다 감각은//끝을 모르고 흘러간다고 할 수밖에//없다" ( '억새풀들이 그들의 소리로' 전문)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시인은 '옷 벗고 살 벗고 생각들도 벗어' 버린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학습된 모든 지식을 털어버리고도 끝끝내 남는 것, 인간 내부의 자연이랄 수 있는 '감각' 으로서 외부의 자연을 바라봄으로써 참 나와 자연의 속내를 드러내려 애쓰고 있다.

"오오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멈칫거리지 말고 말하라 바람은/언제나 흐르는 것이 아니다 바람의/날개에는 솜털 같은 은유들이 실려 있고/은유들은 희망도 없이 부서져 내린다/들판은 멀고 멀다 개울로 흘러가는/물들은 병들었다 수 세기를 두고/오염된 세상은 이제 종달이 하나/떠올릴 힘이 없다" (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중)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서 있는 포플러 나무들이 바람에 온몸으로 흔들리며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명에 오염된 인간들은 더이상 그 뜻을 풀이할 수 없다. 자연의 은유를 읽어낼수 있었던 그 신화적 들판에서 인간은 아득히 추방돼 뿔뿔이 고독 속에 살고 있다. 오염된 세상에 그 신화적 언어를 돌려주며 종달새 높이 날게 하기 위해 시인들은 맨 몸 맨 정신으로 팽팽히 자연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최씨의 시들은 쉽게 읽히며 마음 속에서 금방 잊혀지고 마는 값싼 서정시가 아니다. 곰곰 생각하면서 읽어야 비로소 그 속내를 드러내는 시들이다. 이런 시가 좋은 시들이고 그 좋은 시들은 바쁜 일상에 쩍쩍 갈라터진 메마른 현실적 삶을 한여름 한바탕 소나기 같이 적셔준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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