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토크쇼] '우리말 철학사전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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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번 주부터 기획대담 시리즈 '책이 있는 토크쇼' 를 마련한다.

학술서와 대중서를 망라해 이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화제의 책을 놓고 저자나 그 방면의 전문가와 함께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는 이 코너를 통해 책읽기의 또 다른 재미를 맛보길 기대한다. 첫번째로최근 출간된 『우리말 철학사전1』을 골랐다.

12명의 공동저자 가운데 독일에서 서양 근.현대 철학을 공부한 이기상 외국어대 교수와 김상봉 전 그리스도신학대 교수가 대담자로 나섰다.

사회=책 제목이 눈길을 끈다. "언제는 우리말로 철학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는 문제제기로 대담을 시작해보자.

이기상 교수=서구 이론을 수입 소개하는 '철학 오퍼상 수준' 을 벗어나 우리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주체적 철학을 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 달라. 스스로 철학함이 없이 외국에서 유행한 이론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던 지난 한 세기를 반성하자는 것이다. 서양철학이 상륙한 지 1백년이 지났다.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김상봉 교수=우리말로 철학한다는 것이 한자나 외국어를 배제하고 국어순화운동을 펴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동시대인의 삶을 포괄하며 참된 의미의 우리를 찾아 정체성을 확립하자는 뜻으로 이해하고 참여했다.

사회=영어공용어 주장까지 나오는 세계화시대에 철학의 한국화를 주장하는 것은 너무 국수주의적 아닌가.

이=하지만 잘 보라. 철학의 독일화 혹은 영국화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그 나라 철학자들의 글 속에 그들의 일상적 생활세계가 이미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을 반영한 철학을 하지 못했다. 삶의 현장에서 부대낀 아픔이 반영된 우리의 시대정신을 정립해내지 못한 것이다.

사회=좋다. 이해된다. 이쯤해서 그것과 사전 만드는 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를 되물어보고 싶다.

이=창조적으로 철학을 하기 위해선 믿고 인용할 만한 철학사전과 철학사책이 필수다. 그것은 비유컨대, 숟가락과 젓가락을 갖추는 작업이다. 자기만의 독특한 철학 줄기를 이루고 있는 독일어권.프랑스어권.영미어권 등을 보면 그들이 제일 먼저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실행한 사업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철학사전을 편찬해 낸 일이다. 우리말 철학사전은 주체적 사고를 위한 여건을 만드는 의미있는 첫걸음으로 자부한다.

김=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말의 개성이 철학의 개성이다. 서양 중세엔 담론의 중심이 라틴어였기 때문에 유럽 각 국의 개성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근대 이후 자국어를 쓰면서 개성이 드러났다. 그 개성을 만들어 간 과정을 이론화한 것이 그들의 철학이다. 이제는 우리 철학자들도 서양철학의 개념을 몰라서 열등감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이제는 우리의 일상어로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철학을 하려면 사전도 번역서도 없는 우리 형편에선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 식으로 시작해야 했다. 원전을 참고하기 위해 라틴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에 한문과 일본어까지 한 사람이 다 해야 한다. 외국어가 철학에 필수이기도 하지만 철학이 외국어습득은 아니지 않은가. 이제 사전과 번역이 있다면 많은 시간을 창조적 사유에 쏟아부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두분의 이야기는 우리의 근대화 과정 전반에 대한 반성과도 맞물려 있다.

김=그렇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는 말로 철학의 근본방향을 제시했다.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린 백성이다. 진리를 자기 내면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찾는다. 중국.일본.미국 등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다가온 외세를 흉내내기에 급급했다. 세대간 종교차이가 우리처럼 심한 나라도 드물다. 불교를 믿는 시어머니와 기독교를 믿는 며느리의 갈등과 같은 분열상이 사회 곳곳에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사회=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전통에 대한 고찰도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서양철학 일색으로 돼 있다. 책제목을 '서양철학사전' 이라 해야 옳지 않을까.

이=앞으로 5권까지 나올 예정이니까 계속 지켜봐 달라. 서양철학의 근본개념을 우리말로 고민하며 소화해 풀어내는 일은 당연히 우리의 전통적 사유와 비교를 포함한다. 그 과정에 우리 전통적 사유의 훌륭한 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우리는 현재 모든 면에서 서양의 논리대로 살고 있다. 서양이 다 좋다 혹은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철학하는 자세가 아니다. 서양철학에서 나의 내면을 거울에 비추어보듯 반성하는 전통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들의 한계는 나 이외의 남을 사물화하고 대상화했다는 점이다.

사회.정리〓배영대 기자

사진=김춘식 기자

사진=김춘식 기자

*** 우리말 철학사전1

신간은 12명의 전문가들이 과학. 인간.존재.문화.사회.언어.이성.이해.나.자연.자유.존재 등 서양철학의 핵심개념을 항목별로 나누어 집필한 책이다.

지난 5년간 우리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박이문.김형효.장회익.백종현.이진우 교수 등 중견 철학자들이 함께 토론하고 준비해온 첫 결실이다. 어휘에 대한 정보를 단순 나열하지 않고, 한 항목에 원고지 1백20장 이상을 쓴 작은 논문 형식이다. 앞으로 또 5년간 48개 항목을 다룬 4권을 더 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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