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가 만난 시장 고수] 조재민 KB자산운용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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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조재민(48) KB자산운용 대표는 한국 펀드시장의 뚜벅이로 통한다. 좀처럼 서두르거나 흥분하지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그의 성격이 펀드 운용에도 녹아들기 때문일까? 조 대표가 관리하는 펀드들은 화려하진 않지만 꾸준하게 안정적인 수익을 올린다는 명성을 얻었다. 시장이 출렁임을 거듭하는 변동성 장세일수록 그의 펀드들은 빛을 더한다. 올 1분기가 딱 그랬다. 코스피지수가 연초 1700 언저리에서 출발해 엎치락뒤치락한 뒤 제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KB자산운용의 KB밸류포커스펀드는 6.5%의 높은 수익을 올렸다. 국내 주식형 펀드 중 최고 성적이다. 해외 주식형 부문에서도 KB유로컨버전스펀드가 14.2%의 수익률로 2위에 올랐다. 투자자들도 이를 잘 아는 모양이다. 올 1분기 중 국내 주식형 펀드에서 총 3조6000억원의 자금이 빠져나갔지만 KB자산운용의 펀드로는 1300억원가량이 순유입됐다.

-KB밸류포커스펀드가 올 1분기 중 최고의 수익률을 기록했는데.

“올해 주식시장이 박스권 횡보 흐름을 보일 것으로 예상하고 지난해 11월 새로 만든 펀드다. 내재가치와 비교해 저평가된 주식을 기본적으로 편입하되 시장의 추세를 따르는 모멘텀적 요소도 가미한 게 주효했던 것 같다. 이런 안목으로 발굴했던 효자 종목이 CJ CGV, 태양산업, DMS 등이다.”

-요즘 가치투자가 시장에서 득세하면서 모멘텀 투자는 금기시하는 분위기도 있다.

“가치투자는 저평가된 주식을 사들여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장기 투자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만큼 큰 비용도 따른다. 전문 투자가라면 모멘텀 투자도 병행해야 하는 이유다. 모멘텀 투자란 기업의 미래 가치에 영향을 줄 새로운 재료와 시장 내 수급, 기술적 지표 등 다양한 정보에 근거해 중단기적 추세를 좇아 투자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런 투자에는 발 빠른 정보 수집력과 매매 타이밍을 잡아내는 직관력이 요구되는 만큼 일반 투자자들에겐 적합하지 않다.”

-최근 국내외 경제지표가 호조를 보이고 코스피지수가 1700선을 회복했다. 증시의 큰 흐름을 어떻게 보나.

“시장이 탄탄한 상승 추세로 접어들었다고는 아직 보지 않는다. 코스피지수 1600~1800 정도의 박스권 장세가 1~2분기 더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최근 좋게 나오는 국내외 경기지표는 여전히 초저금리와 재정지출에 의존한 측면이 강하다. 나는 출구전략 이후를 오히려 기대한다. 제대로 된 강한 상승장은 금리인상 이후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과거에도 금리인상이란 매를 맞고도 경기가 계속 좋아질 때 시세가 분출했던 적이 많다.”

-코스피지수가 1700선을 넘어선 뒤 국내 투자자들의 펀드 환매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반면 외국인들은 그 매물을 열심히 거둬들여 대조를 보인다. 과거에도 이런 대치국면이 이어진 뒤로는 결국 외국인들이 큰 수익을 올렸는데.

“내년까지 길게 보면 국내 증시가 20% 정도는 상승할 것으로 본다. 무엇보다 기업들의 실적이 좋아질 것이다. 외국인들 입장에선 원화가치 상승에 따른 환차익까지 10% 정도 더 기대하는 상황이다. 국내 투자자들에게 환매를 자제해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금융위기 이후 펀드 손실로 마음고생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과실을 다시 따먹을 시점이 멀지 않았는데 주식을 외국인에게 싼값에 넘기고 떠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환매한 뒤로 시장이 하락하지 않고 계속 오르면 재매수할 기회를 잡기가 힘들다. 대개 시장이 한참 더 오른 뒤 국내 투자자들은 다시 펀드에 가입하고, 외국인들은 거꾸로 주식을 파는 패턴이 과거에도 반복됐다.”

-국내 펀드 판매·운용사들도 책임이 있지 않나. 시장이 좋을 때는 덩달아 흥분해 펀드 판매에 열을 올리더니 시장이 침체한 이후론 나 몰라라 식으로 투자자들과의 소통을 꺼리고 있다. 미국의 워런 버핏처럼 투자자들이 믿고 따르는 마켓 리더가 한국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공감한다. 나도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 한국의 펀드시장은 그동안 과도한 마케팅에 노출됐던 게 사실이다. 운용사와 판매사 모두 판매 확장이 최우선 목표였다. 그러다 보니 유행하는 펀드로의 쏠림을 조장했고 서로 엇비슷하게 모방한 펀드를 쏟아냈다. 시장이 꺾인 뒤로는 방치된 자투리 펀드가 허다했다. 그 결과 투자자들의 불신을 자초했다. 하지만 차츰 달라지고 있다. 책임감을 갖고 길게 승부하는 펀드가 늘고 있다. 투자자들의 안목도 깐깐해져 돈이 들어오는 펀드와 빠져나가는 펀드가 구분되고 있다.”

조 대표는 외국계 은행에서 외환·채권 딜러로 11년간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 뉴욕대 MBA(경영학 석사)를 마친 뒤 씨티은행 서울지점에서 외환 딜러로, 엥도수에즈은행 홍콩지점에선 채권 딜러로 근무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국제 금융시장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부동산시장에도 조예가 깊다. 씨티은행 근무 때 부동산 세제를 독학해 『부동산 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환율 흐름은 증시에도 큰 영향을 준다. 최근 원화 강세가 주가에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보나.

“달러당 1050원 선까지 원화절상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외국인들도 그 정도를 기대하며 한국의 주식 및 채권에 투자하고 있다고 본다. 1050원 정도까지는 국내 수출기업들이 수익성에 큰 손상을 입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밑으로 내려가면 부정적 효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외국인들은 아마도 주식 매수를 멈출 것이다.”

-최근 집값 하락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본식 장기침체가 올 것이란 시각까지 있는데.

“국내 부동산 버블은 강남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된 것으로 본다. 일본식의 침체는 없다고 예상한다. 그렇다고 오르기도 힘들 것이다. 부동산 투자로 돈 벌기는 갈수록 힘든 세상이 됐다. 노후 대비를 위해선 부동산 비중을 줄이고 펀드 등 금융자산 비중을 높여나가야 한다.”

-한국 기업의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 아이폰의 등장을 보면서 삼성전자도 언제 위기를 맞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 증시에 장기 투자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겠나.

“한국의 수출기업들이 지금의 경쟁력을 3~5년은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는 지금부터 어떻게 대비하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기업들이 잘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한국 경제가 일본처럼 되지 않기 위해선 내수 서비스산업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글=김광기 선임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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