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7) 1사단 노병들이 증언하는 다부동 전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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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을 마친 국군 1사단의 다부동 전투 참전용사들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마당의 동상앞에 모였다. 왼쪽부터 이덕빈 소대장(이하 당시 직책이나 계급), 황대형 일등중사, 김국주 중대장, 백선엽 사단장, 김점곤 연대장, 최대명 작전참모, 전자열 중대장. [변선구 기자]

“그때, 다부동 방어선 뚫렸다면 대한민국은 사라졌다”

그해 여름은 참으로 무덥고 처절했다. 1950년 8월 한 달 동안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지낸 한철이다. 국군 1사단 소속이던 나와 내 전우들은 두 달여 전 기습 남침했던 북한군을 상대로 혹독한 전투를 벌였다.

지난달 16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다부동의 옛 전사(戰士)들이 다시 모였다. 당시 소속 을 기준으로 12연대장 김점곤(87·예비역 소장) 대령, 15연대 작전참모 최대명(86·예비역 소장) 소령, 15연대 2대대 6중대장 김국주(86·예비역 소장·전 광복회 회장) 대위, 12연대 1대대 3중대장 전자열(85·예비역 소장) 대위, 11연대 1대대 2중대 2소대장 이덕빈(85·예비역 소령) 중위, 15연대 1대대 3중대 황대형(80·예비역 상사) 일등중사가 자리를 함께했다. 1사단의 사단장이던 나와 각급 부대 지휘관, 일선의 병사가 다 모인 셈이다. 이들의 회고로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를 지켜냈던 다부동 전투를 돌아본다.

김국주: 참으로 수많은 젊은 생명이 다부동 전투에서 쓰러졌다. 신병이 와서 이틀 정도 버티면 고참병이 되는 식이었다. 총탄과 수류탄을 날리는 싸움이 중심이었으나 직접 적과 몸으로 부딪치는 백병전도 자주 벌였다. 특히 비 오는 밤, 아주 컴컴한 어둠 속에서 돌연 나타나는 적들과 백병전을 벌이면서 찌르고 때리는 싸움이 처절하게 벌어졌다. 그렇게 싸우면서 ‘한민족은 결코 스러지지 않는 강인한 민족’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부동 전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운(國運)이 걸렸던 싸움이다. 길이 역사에 남겨야 하는 이유다. 싸움을 하면서 우리 부대원들에게는 처참한 동족상잔의 참극을 일으킨 김일성에 대한 증오가 가장 컸다.

황대형: 내가 맡았던 다부동 전선 서부의 328고지 위에서는 한참 싸움이 벌어질 때 온전한 시체가 남아 있질 않았다. 모두 찢기고 해진 시신 조각들이 나무나 바위 등에 걸쳐 있는 상태였다. ‘시체를 쌓는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틀렸다. 부패한 시신은 절대 쌓이지 않는다. 미끄러져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건빵 먹는 것을 보고 고참병인지 신병인지 판단할 정도다. 병사들은 건빵 두 봉지를 배급 받았는데, 고참병은 한 알 두 알씩 꺼내서 천천히 먹는다. 신병은 배가 고파 마구 먹는다. 고참병들은 건빵을 먹는 대로 갈증이 몰려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천천히 먹으면서 갈증을 피한다. 신참은 허겁지겁 먹고 목이 메어 물을 마시려고 산에서 내려가다가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

전자열: 다부동 격전이 지난 뒤 고지를 오르는데 정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주검들이 풍겨내는 냄새 때문이었다. 이때 처음 미군으로부터 건네받은 화염방사기를 써봤다. 효과가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재일동포 부대원이었다. 공격을 시도하고 있던 순간에 그가 총에 맞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는데, 나를 보면서 “중대장님, 먼저 갑니다”면서 쓰러졌다. 웃는 얼굴이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대한해협을 넘어온 재일동포 청년의 마지막 웃음은 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덕빈: 북한군 T-34 탱크와 싸웠다. 나는 중화기 소대장으로서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적의 탱크를 공격하는 일을 맡았다. 50m 앞까지 진격해 적의 전차를 노려야 했다. 그 뒤를 따라오는 북한군과 백병전까지 치른 뒤 우리는 탱크에 기어올랐다. 적 탱크에 성공적으로 올라선 뒤에는 뚜껑 격인 해치를 뜯어가면서 파괴했다. 치열한 격전 끝에 적 포로도 많이 잡았다.

최대명: 그때는 지도도 없었다. 사령부에서는 학교에서 구해 온 대한민국 전도를 보면서 작전을 세웠고, 일선에 나가 있던 사람들은 조그만 수첩에 실린 지도를 보면서 작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면 소재지에 가서 현지 지형을 그린 향토지도를 구해 가지고 와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 경우도 잦았다.

김점곤: 다부동 전투의 의미가 특별하다. 여기서 왜 더 이상 후퇴를 할 수 없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다부동의 낙동강 전선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지연 작전이었지만, 도착 뒤의 전쟁은 방어전이었다. 지연전과 방어전은 다르다. 방어전이 더 절실하고 처참하다. 이곳을 내주면 대구와 부산은 위험했다. 자칫 대한민국이 없어질 뻔한 위기였다. 다부동 전투는 그래서 의미가 크다. 그때 다부동에서 밀리면 미군이 한국군을 일본으로 데려가 재편성해서 전투를 치른다는 얘기가 많이 나돌았다. 제주도로 옮겨가 최후 항전을 벌일 것이라는 풍문도 있었다. 그만큼 절박했다는 얘기다.

황대형: 당시 국군 1사단은 태반이 전라도 출신 병력이었다. 사단의 첫 출발지가 호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병으로 충원되던 병력의 대부분은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병력이었다. 말하자면 다부동 전투는 영·호남이 한데 뭉쳐 적을 막아낸 싸움이다. 그때는 영·호남의 지역 감정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16년 동안 다부동 전선을 파서 유해를 발굴하고 있는데, 지금도 끝이 없을 정도로 전사자 유골이 나온다. 요즘도 발굴 작업을 하다 보면 유해들이 발견되는데, 온전하게 나오는 법이 없다. 여기저기 널려진 상태로, 토막으로만 나온다. 심한 곳은 땅 밑에서 20㎝만 파도 유해 일부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해 발굴 작업은 전체 전사자의 10% 정도를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전자열: 북한군은 대구를 차지하기 위해 격렬히 공격을 했다. 당시 전투 현장에서 한 북한군 시신을 봤는데, 사실 끔찍했다. 기관총 사수였는데 바닥에 쇠사슬로 발이 묶여 있었다. 죽을 때까지 총을 쏘라는 식으로 북한군 지휘부가 그렇게 내몬 것이다. 나는 2년 전인가에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전투 당시 연대장과 대대장을 각각 지냈던 선배들을 모시고 갔다. 내가 싸웠던 격전지에 올랐더니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들만 무성했다. 1개 중대가 12차례나 돌격해 부대원의 절반이 죽었던 곳이다. 낙엽을 모아놓고 가지고 간 소주를 그 위에 뿌린 뒤 묵념을 하면서 제사를 올렸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다.

김점곤: 이름 없이 죽어간 학도병,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어 사망한 재일동포 청년들이 군적(軍籍) 없이 사라져간 무명의 용사들이다. 이들이 남긴 사진이라도 찾아서 그 유족들에게 마땅한 예우를 해줘야 옳다. 우리야 군 생활을 비교적 오래 하며 살아남아서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지만, 짧은 기간 생명을 걸고 전투에 나섰던 노병(老兵)들은 그런 혜택이 거의 없다. 생활이 어려워 탑골 공원 등을 찾아다니면서 무료급식을 받는 사람이 많다. 이들에 대한 마땅한 대접도 국가가 나서서 생각해야 할 일이다.

동족상잔의 처절했던 전쟁은 이렇게 낱낱이 기억되고 있다. 모두 여든 줄의 나이지만, 60년 전의 전투 장면을 꺼내기 시작하면 금세 열기로 가득 채워진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전쟁과 살육의 상흔(傷痕), 그것은 세월의 무덤덤함을 겪으면서도 결코 가벼워지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이를 후세가 제대로 기록하고,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다부동 전투=국군 1사단과 미군 일부 병력이 1950년 8월 초부터 약 한 달 동안 대구 북방 약 20㎞의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서 남침한 북한군 3·13·15사단을 상대로 벌인 전투다. 국군이 지키지 못할 경우 대구와 부산까지 내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가 다부동이다. 북한군은 이를 공략하기 위해 최정예 병력으로 공격을 벌였다. 아군은 340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이곳을 지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아군은 낙동강 전선의 최후 교두보를 지켰고, 종국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6·25전쟁의 국면을 완전히 뒤바꾸는 획기적인 전투였다. 그런 만큼 처절한 격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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