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을 마친 국군 1사단의 다부동 전투 참전용사들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마당의 동상앞에 모였다. 왼쪽부터 이덕빈 소대장(이하 당시 직책이나 계급), 황대형 일등중사, 김국주 중대장, 백선엽 사단장, 김점곤 연대장, 최대명 작전참모, 전자열 중대장. [변선구 기자]
그해 여름은 참으로 무덥고 처절했다. 1950년 8월 한 달 동안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지낸 한철이다. 국군 1사단 소속이던 나와 내 전우들은 두 달여 전 기습 남침했던 북한군을 상대로 혹독한 전투를 벌였다.
지난달 16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다부동의 옛 전사(戰士)들이 다시 모였다. 당시 소속 을 기준으로 12연대장 김점곤(87·예비역 소장) 대령, 15연대 작전참모 최대명(86·예비역 소장) 소령, 15연대 2대대 6중대장 김국주(86·예비역 소장·전 광복회 회장) 대위, 12연대 1대대 3중대장 전자열(85·예비역 소장) 대위, 11연대 1대대 2중대 2소대장 이덕빈(85·예비역 소령) 중위, 15연대 1대대 3중대 황대형(80·예비역 상사) 일등중사가 자리를 함께했다. 1사단의 사단장이던 나와 각급 부대 지휘관, 일선의 병사가 다 모인 셈이다. 이들의 회고로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를 지켜냈던 다부동 전투를 돌아본다.
김점곤: 다부동 전투의 의미가 특별하다. 여기서 왜 더 이상 후퇴를 할 수 없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다부동의 낙동강 전선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지연 작전이었지만, 도착 뒤의 전쟁은 방어전이었다. 지연전과 방어전은 다르다. 방어전이 더 절실하고 처참하다. 이곳을 내주면 대구와 부산은 위험했다. 자칫 대한민국이 없어질 뻔한 위기였다. 다부동 전투는 그래서 의미가 크다. 그때 다부동에서 밀리면 미군이 한국군을 일본으로 데려가 재편성해서 전투를 치른다는 얘기가 많이 나돌았다. 제주도로 옮겨가 최후 항전을 벌일 것이라는 풍문도 있었다. 그만큼 절박했다는 얘기다.
황대형: 당시 국군 1사단은 태반이 전라도 출신 병력이었다. 사단의 첫 출발지가 호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병으로 충원되던 병력의 대부분은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병력이었다. 말하자면 다부동 전투는 영·호남이 한데 뭉쳐 적을 막아낸 싸움이다. 그때는 영·호남의 지역 감정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16년 동안 다부동 전선을 파서 유해를 발굴하고 있는데, 지금도 끝이 없을 정도로 전사자 유골이 나온다. 요즘도 발굴 작업을 하다 보면 유해들이 발견되는데, 온전하게 나오는 법이 없다. 여기저기 널려진 상태로, 토막으로만 나온다. 심한 곳은 땅 밑에서 20㎝만 파도 유해 일부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해 발굴 작업은 전체 전사자의 10% 정도를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전자열: 북한군은 대구를 차지하기 위해 격렬히 공격을 했다. 당시 전투 현장에서 한 북한군 시신을 봤는데, 사실 끔찍했다. 기관총 사수였는데 바닥에 쇠사슬로 발이 묶여 있었다. 죽을 때까지 총을 쏘라는 식으로 북한군 지휘부가 그렇게 내몬 것이다. 나는 2년 전인가에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전투 당시 연대장과 대대장을 각각 지냈던 선배들을 모시고 갔다. 내가 싸웠던 격전지에 올랐더니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들만 무성했다. 1개 중대가 12차례나 돌격해 부대원의 절반이 죽었던 곳이다. 낙엽을 모아놓고 가지고 간 소주를 그 위에 뿌린 뒤 묵념을 하면서 제사를 올렸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다.
동족상잔의 처절했던 전쟁은 이렇게 낱낱이 기억되고 있다. 모두 여든 줄의 나이지만, 60년 전의 전투 장면을 꺼내기 시작하면 금세 열기로 가득 채워진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전쟁과 살육의 상흔(傷痕), 그것은 세월의 무덤덤함을 겪으면서도 결코 가벼워지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이를 후세가 제대로 기록하고,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다부동 전투=국군 1사단과 미군 일부 병력이 1950년 8월 초부터 약 한 달 동안 대구 북방 약 20㎞의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서 남침한 북한군 3·13·15사단을 상대로 벌인 전투다. 국군이 지키지 못할 경우 대구와 부산까지 내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가 다부동이다. 북한군은 이를 공략하기 위해 최정예 병력으로 공격을 벌였다. 아군은 340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이곳을 지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아군은 낙동강 전선의 최후 교두보를 지켰고, 종국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6·25전쟁의 국면을 완전히 뒤바꾸는 획기적인 전투였다. 그런 만큼 처절한 격전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