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자본의 유전자 확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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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4, 000, 000, 000, 000원대 큰손' .

지난 22일자 본보에 실렸던 '미국 캐피털 그룹, 한국 증시에 버팀목' 이란 기사의 제목이다. 편집자의 시각 메시지 해학은 근사했지만, 나는 0의 숫자를 한참이나(!) 세어보고야 그것이 4조원임을 알았다.

3천2백50억달러의 자산 운용으로 세계 금융시장을 지배하는 이 미국 회사는 삼성전자.포항제철.현대자동차 등 국내 굴지의 기업 주식 4조원어치를 소유함으로써 증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내용이었다.

자본에 국경이 없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 자본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므로 어디든지 돈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돈 버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국경쯤 허물어도 좋다는 '세계화' 강요의 함의가 엿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돈만 벌리면 조국쯤은 얼마든지 버려도 좋은(?) 자본가의 행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자본가는 성향적으로 '비애국' 집단이다. 거기서 이런 변주곡이 나온다.

예컨대 자본은 의당 달러이고 원은 '엽전' 에 불과하며, 또 공기업은 의당 외국에 팔아야 하기 때문에 국내 매각은 재벌의 문어발을 늘릴 뿐이라는 강박관념 말이다. 그래서 외자가 국내 증시를 좌우하고 내국 기업을 접수하면 구조조정에 성공한 것이고, 거기에 우려를 표하면 세계화를 거역하는 옹졸한 국수주의자로 몰리게 된다.

돈에는 꼬리표가 없다. 외자든 내자든 사람 쓰고 물건 만들어내면 됐지 자본에 웬 국적 타령이냐는 반론은 일견 그럴듯하다. 과연 그렇기만 한가?

일례로 미국 자본이 멕시코에서 퍼내는 석유는 멕시코 국내총생산(GDP)에 잡힌다. 외자 덕분에 멕시코는 '통계상' 그만큼 부자가 되지만, 이윤 송금으로 일어나는 국부 유출은 그 계산에서 빠진다. 그게 어찌 멕시코만의 산술이랴?

12조5천억원의 공적자금을 들이부은 은행을 5천억원 받고 외국에 파는 희한한 나라도 있는데!

자본의 국적을 묻지 말자는 미국에서도 노동부는 미국 땅에 공장 짓고 일자리를 만들면 미국 기업이라고 내세웠지만, 자유무역의 전도사 무역대표부(USTR)는 임자가 미국인이라야 미국 기업이라고 맞섰다.

1980년대의 등록 상표는 무엇보다 저항이었다. 그때는 나도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 애초에 없는 것을 빼앗을 수는 없지 않은가" 라는 그 유창한 레토릭을 암송하며, 도매금으로 자본의 국적을 조롱했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관리 체제에 즈음해 알짜배기 기업을 외국에 팔고 소유자의 국적에 상관없이 국내 기업으로 대하라는 대통령의 엄명이 나오면서 나는 이 소신을 버렸다. 외자의 무참한 '기업 사냥' 앞에 미국 노동자처럼 한국 노동자도 조국이 있으며, 미국 자본가와 달리 한국 자본가는 조국이 있어야 한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27일 현재 SK텔레콤의 외국인 지분은 47%, 삼성전자는 57%, 포항제철은 59%에 이르렀다. 변변한 은행 가운데 내국인 소유가 몇이나 되는가?

나라 경제를 이렇게 거덜내고도 정부는 'IMF 극복' 찬송가 보급에 바쁘다. 무조건 외자를 막자는 것이 아니라, 외자 맹신으로 인한 내자 이용 기회의 박탈을 막자는 말이다. 내자가 없으니 외자에 매달리고, 내자를 긁어모아야 몇 푼이나 되느냐는 고정관념이 경제를 망치고 있다.

GDP 4천5백억달러 가운데 34%를 저축하는 세계 12위의 우리 경제에 자생적 축적이 가능하지 않다면 대체 어느 나라가 가능할 것인가?

증시로, 은행으로, 부동산으로 철새처럼 몰려다니는 떼돈이 있고, 사회 일각의 '제로 금리' 탄식에 은행이 '대출 세일' 에 나서는 판이다. 실로 문제는 그 돈을 생산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달러에만 굽실거리는 정부 정책의 외세 의존적 체질에 있다.

개발 연대의 외자는 그래도 길 닦고 공장 지은 생산자본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외자는 한탕하고 달아나는 투기자본이 주류다. 초등학생의 돼지 저금통이 미덕이던 시절 우리한테는 어서 외국 빚 갚고 떳떳이 살자는 결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저금통을 우습게 여기면서 우리는 '외국인 투자' 라는 참으로 두려운 상전을 모시게 되었다. 증시와 대외 신용이 그들의 손길에 널뛰고, 노조마저 그들의 발길에 숨을 죽여야 했다. IMF 탁치를 통해 우리는 국제 투기자본의 노리개 - 노예 - 설움을 뼈저리게 맛보았다. 자본이든 자본가든 국적의 유전자 확인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엽전을 존중하라!

그것이 우리 경제에 보내는 나의 두번째 고언이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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