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진경 '그 애의 백제 미륵반가사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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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제 여중학교짜리 애가

남자애와 살림을 차렸는지

찾아간 산동네

단칸방 앞에서 불러도 대답은 없고

방문을 여니

희미하게 비쳐드는 햇빛 속

옷궤짝 위에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다

슬퍼하는 겐지

무슨 비밀스러운 걸 알았다는 겐지

빙긋이 웃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애의 눈빛이 깊어

그냥 방문을 닫다

- 김진경(1953~ ) '그 애의 백제 미륵반가사유'

시적 화자는 산동네로 결석한 학생을 찾아간 중학교 선생님. 교사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빙긋이 웃는, 이른바 문제학생과 그 눈빛을 보고 방문을 닫는 선생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시의 울림은 시의 주인공인 여학생과 화자의 그 불투명한 태도에서 발생한다.

실제로 시인은 이 땅의 교육운동을 앞에서 이끌던 투명하고 합리적인 선생님. 주장과 선언 대신 시의 불투명한 여백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상당한 시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뜻. '그냥' 은 무책임한 말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세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드러내는 말이 되고 있다.

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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