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정진규 '비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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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비누가

나를 씻어준다고 믿었는데

그렇게 믿고서 살아왔는데

나도 비누를 씻어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몸 다 닳아져야 가서 닿을 수 있는 곳,

그 아름다운 소모를 위해

내가 복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누도 그걸 하고 있다는 걸

그리로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내 당도코자 하는 비누의 고향!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바 아니며

다만

아무도 혼자서는 씻을 수 없다는

돌아갈 수 없다는

- 정진규(1939~ ) '비누'

시인이란 새로이 발견하는 자임을 여기서 다시 감동적으로 확인한다. 비누를 씻어주는 나를 발견한 것은 시인의 눈이지만, 소멸을 향해 함께 간다는 인식은 시인의 가슴에서 나왔다. 혼자서는 씻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누는 비누가 아니라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맺힌 애인이 되고 생의 반려자가 된다. 당신은 누구에게 비누인가. 당신은 지금 누구와 함께 돌아가고 있는가.

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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