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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사 박영두씨 '민주화 운동' 인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재소자들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다 교도관들의 고문으로 숨진 희생자가 정부 기관에 의해 처음으로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받게 됐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梁承圭)는 25일 "1984년 청송 제1보호감호소(현 청송교도소)에서 사망한 박영두(朴榮斗.당시 29세.사진)씨는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다가 교도관들의 집단 고문에 의해 숨졌다" 고 공식 발표했다.

위원회는 이날 이같은 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조만간 대통령 직속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에 朴씨 및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청할 예정이다.

◇ 박영두 사건=朴씨는 형이 운영하는 체육사 일을 돕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는 25세 때인 80년 여름 고향인 경남 통영 비진도 해수욕장으로 휴가를 갔다가 비운을 맞게 된다.

그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불량배로 간주돼 뚜렷한 이유없이 경남 창원의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던 것.

'삼청교육대' 란 80년 5월 전두환(全斗煥)씨에 의해 비상계엄이 발령된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가 폭력범과 풍토문란 사범 등을 소탕한다며 군 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이다.

朴씨는 81년 1월 재판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 는 이유로 보호감호 2년을 선고받고 강원도 화천의 육군감호소로 이송됐다.

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육군감호소 재소자들은 옷을 벗고 깨진 유리 위에서 포복을 하거나 야전삽으로 매를 맞는 등 잔혹한 구타에 시달렸다.

朴씨는 그곳에서 재소자들을 대표해 '정식 재판을 받게 해달라' '구타를 하지 말라' 고 요구하다가 집단난동 선동 혐의로 그해 12월 군사 재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청송감호소로 옮겨졌다.

朴씨는 84년 10월 12일 오후 "몸이 아프다" 며 의무과에 데려다 줄 것을 요구하다 지하조사실로 끌려가 교도관 7~8명에게 두시간 가량 집단 가혹행위를 당했다가 자신의 독방으로 옮겨진 뒤 다음날 새벽 숨졌다.

그는 숨지기 직전까지 재소자들과 함께 '전두환 정권 퇴진' '보호감호 철폐' 등을 요구했으며 교도소의 열악한 인권 실태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 의무과에 옮겨 줄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朴씨는 당시 수갑이 채워지고 포승으로 몸이 묶인 채, 양팔을 고개 뒤로 젖히고, 양 팔꿈치가 서로 붙도록 묶은 다음 목과 팔꿈치 사이에 끼운 각목을 비트는 이른바 '비녀꽂기' 등 다양하고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 조직적 은폐=당시 교도소측은 의성지청에 보낸 보고서에 '朴씨가 조사실에서 머리를 수회 벽에 부딪치며 조사에 불응했다' 고 쓰는 등 朴씨의 타살을 조직적으로 은폐한 것으로 드러났다. 위원회는 가해 교도관 4명과 사건을 은폐한 교도소장.보안과장 등 6명에 대해 공소 시효(10년)가 지나 고발은 하지 않는 대신 실명을 공표했다.

성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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