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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불쑥 내민 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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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한 시인 이기성(38)씨의 첫 시집 『불쑥 내민 손』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상, 어쩌면 그래서 더 사태의 진상(眞相)에 가까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가령 ‘모란시장에서’는 개고기가 유통되는 대표적인 곳 중 하나인 성남 모란시장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곳은 “찐득한 누린내 가득 고여 있는 골목, 가래침 뱉으며 시커먼 고무장화 신은 사내가 철창 앞에 서면, 화들짝 벌어지며 경련하는 눈, 눈동자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여기서 놀라는 눈동자들은 개들의 것이다. 시의 후반부, 개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이 비릿한 공포만은 아니라고 얘기해 준 노인은 “늙은 구름”으로 표현된다. 노인은 존재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중간적인 상태인 구름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미궁’에서 열두 마리 먹갈치를 팔러 온 트럭 장사꾼 사내는 날이 저물자 공중전화 유리 부스 안에서 전화선을 꼭 말아 쥐고는 “어매야 어매야 쉰 목소리”로 운다.

이씨의 세계에서는 ‘휴일’마저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이 아니다. “니코틴에 찌든 사내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쪼그라들고” “텔레비전에선 쩍 벌어진 뱀의 입 속으로 어린 짐승이 소리도 없이 빨려들어”간다.

이씨가 펼쳐보이는 세계는 종종 초현실주의적인 모습으로 흐른다. 그런 순간 시는 감상이 아닌 ‘해독(解讀)’의 대상이 된다.
여러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엇비슷한 경우를 통해, 예컨대 ‘길’은 단순한 물리적인 이동 통로가 아닌, 인생의 경과와 관련된 좀 더 시간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짚어볼 수 있다. 때때로 길은 통로보다는 단순한 공간적 범위를 지칭하기도 한다.
‘구두’는 밑바닥에 쩔꺽쩔꺽 생이 들러붙거나, 각질의 뒤꿈치와 발가락 사이 부패한 냄새와 모독의 기미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구두의 주인과 고스란히 동격으로 놓일 수 있는 존재다.

경우에 따라 더디고 힘든 작업이지만 이씨의 시를 읽는 즐거움은 곳곳에서 빛나는 대목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열쇠’의 시작 부분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열쇠를 깎는 사람이다. 뭉툭하게 잘린 세 개의 손가락 협곡처럼 어두운 세계의 한 귀퉁이를 단호하게 벼려낼 때, 이를테면 세계는 열린 문과 열리지 않는 문, 어떤 섬광과 마찰의 틈새로 발목을 슬그머니 끌어당기는 구멍투성이 문장이다.”
열쇠 깎는 주인공이 왜 손가락이 세 개가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명백하게 열쇠 깎는 과정으로 읽히는 시의 대목은 시인의 시 쓰는 과정으로도 읽힌다.

이씨의 등단작이기도 한 ‘지하도 입구에서’는 삶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통찰들로, 여러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절대로 발목 위로 고개를 드는 법이 없다./누구나 세상을 걸어가기 위해 한 켤레의 구두를/장만하듯 그는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다./때로 하반신 검은 타이어로 싸맨/사내의 앞으로 백동전들이 굴러오는 경우가 있으나/그건 그를 모르는 자들이 두들겨대는/헛된 노크에 불과하다. 그는 절대로 열리지 않으리니.”

‘북어를 일별하다’의 표현과 시선도 인상적이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돌던 스승은 길 위에 뱃바닥을 좍 펼쳐놓았다. 식어버린 오장과 육부를 들어내자 햇빛과 담배연기 머물렀던 자리마다 울긋불긋 곰팡이가 슬었는데, 거기선 그가 생전에 퍼마시던 비린 문장의 냄새가 나더란다.

식탐으로 점철된 그의 한 생애는 뿌연 먼지 일던 길보다 더 허기진 것이었으니, 그는 이제 삼켜버린 길을 다 게워내 돌려주려는 것이겠다. 허공에 벌어진 입술이 마지막으로 오물딱거리다 멈추고, 재빠른 쥐들이 파먹은 눈구멍 鬼(귀)와 神(신)을 희롱하던 문장들 죄다 증발하자 낡은 구름이 한 채 느릿느릿 부서져 흘러나왔다는데,”(부분)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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