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혁명가의 불행한 인생 그린 '나의 생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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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혁명과 낭만과 비극, 인간 삶과 역사의 가장 극적 요소를 한 몸에 체화(體化)한 인물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신비감을 더해간다.

지난해 국내에서 출간돼 화제를 모은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이 그랬지만, 첫 출간 70년 만에 번역된 레온 트로츠키의 자서전 『나의 생애』도 같은 맥락이다. 1930년에 펴낸 이 책은 우리로선 신간이지만 세계적으론 이미 거론될 만큼 거론된 구간이다.

따라서 "혁명 와중에서도 펜을 놓은 적이 없었다" 는 트로츠키의 공언대로 동시대인에 의한 리얼한 기록이 높이 평가되는 이 책을 '역사의 종언' 이 유행처럼 언급되는 이 시대 다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좌파(左派)운동을 외면해야 했던 지난 냉전시대의 파행(跛行)을 책읽기 형태로 되새김질하는 과정일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었고 레닌의 후계자격이었으면서도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비극적으로 최후를 마친 트로츠키(1879~1940).

그가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망명지 멕시코에서 머리에 망치를 맞아 죽기 10년 전인 49세 때 자신의 삶과 투쟁을 일대기 형식으로 정리해 낸 『나의 생애』는 격동적으로 전개된 20세기 초반 러시아 혁명의 현장기록이다. 러시아 제정 말기의 한 유대인 농가에서 자란 그의 어린시절과 성장과정, 그리고 혁명가로서의 내면 풍경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상권은 미국 뉴욕에 망명할 때까지를 다루고 1917년 러시아혁명에 대한 기록은 오는 9월께 번역.출간될 하권에 기록된다. '영구(연속)혁명론' 을 주장한 그의 정치적 입장을 감안하고 읽어야 할 이 책은 삶의 순간순간을 기록한 메모와 인쇄물이 바탕이 되고 있다.

그의 주장에서 오늘 우리 현실에 적실한 내용이 없고 또 그가 개인적으로 혁명 이후 불행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그가 남긴 이 책과 그의 또 다른 저서인 『러시아 혁명사』의 기록적 가치는 그의 삶의 비극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언의 유명한 한 구절처럼 "인생은 아름답다" 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교적 유복한 농가에서 자란 그는 우리로 따지면 고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그에게 대학 역할을 한 것은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 그리고 망명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전교 수석을 차지한 그는 한 급우가 교사로부터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에 저항한 일이 발단이 되어 퇴학처분을 받고 이듬해 재입학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밝힌 어린 시절의 성격은 내성적이며 융통성도 없고 보수적이었다고 한다. 수학 과목에 뛰어나 졸업할 무렵까지 수학자의 길을 걸을 생각도 했다. 한때 문학에 심취해 시도 쓰곤 했던 그는 당시 학교 분위기를 마치 '정신 병동' 처럼 묘사한다. 괴팍한 성격의 교사들의 부패상이 아직 사회의식에 눈뜨기 전인 그의 기억에서 진득하게 묻어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영구혁명론' 이란 자본주의 후진국인 러시아가 공산주의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선 공장의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동시에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며, 특히 소련 혼자만의 힘으론 안되고 유럽 등 세계각국의 혁명세력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1차대전 이후 미국 뉴욕에서 2개월간 망명했던 시절의 인상기를 보면 "자본주의적 자동화의 도시인 뉴욕은 퀴비즘의 미학이 군림하고 세계의 어느 도시보다 현대라는 시대 정신을 완벽하게 체현하고 있다" 며 "유럽 경제가 무너져가고 있는 시점에 세계의 문화.경제의 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하지 않을까□" 라고 쓰여있다.

유럽에선 사회주의 정당에서 트로츠키파가 여전히 한 축을 이루고 있고, 최근엔 내년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는 프랑스 조스팽 총리가 젊은 시절 트로츠키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는 전력으로 곤욕을 치른 일이 우리 언론에도 소개돼 트로츠키란 이름을 다시 떠오르게 한 바 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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