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라디오 출연 주부들과 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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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左)이 5일 오전 MBC 라디오 '양희은.송승환의 여성시대' 프로에 특별손님으로 출연, 방청객들과 대화하고 있다.[연합]

노무현 대통령이 5일 MBC 라디오의 인기 프로그램인 '양희은.송승환의 여성시대'에 출연했다. 두 시간 동안 주부들과 서민의 애환과 민생 경제에 대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대통령이 구구절절한 서민들의 고통을 직접 확인하고 진지하게 해법을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간의 딱딱한 시사토론 출연과는 차이가 있었다.

◆ "목이 메고 눈물 나"=2년에 걸친 남편의 실직 중에 아이의 돌을 맞은 주부가 지갑 속의 전부인 4000원을 쪼개 맘모스 빵과 두부 한모, 튀김, 과자 한 봉지로 돌상을 차린 사연이 소개됐다. "맘모스 빵을 사면서 초를 하나 얻고 아이 머리에 씌워줄 고깔 모자를 하나 달라고 하자 '케이크용으로 나온 것'이라며 거절당했다"는 얘기를 소개하던 이 주부는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고 토로했다.

노 대통령은 "내가 온다고 아주 가슴 아픈 사연으로 특별히 골랐죠◆ "라고 물었다. 그러고는 "이 편지를 세 번 읽고 왔다"며 그 이유를 "목이 메고 눈물이 나 방송에서 실수할 것 같았고 몇 번을 읽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라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나도 자라면서 어머니가 만날 (주로) 큰형님에게 젖을 물리면서 키웠다. 하지만 형님이 성공을 못 하니까 그 때문에 '너희들이 고생한다'고(하셨다)…"라고 회상했다. 노 대통령은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키가 제일 작았다"며 "어머니가 못 먹여서 키가 안 큰다고 매일 가슴 아파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아마 지금 편지를 쓰신 어머니의 마음 같을 것"이라며 "우리 어머니…. 그런데 가슴 아프던 그 자식이 커서 지금…"이라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직접 편지를 읽기도 했다. 15평짜리 지하 양말공장을 운영하는 영세기업주의 딸이 보낸 편지다. 여기엔 "다들 어렵다던 IMF 시기도 억지로 억지로 넘기신 아버지였는데 지금의 경제 불황은 아버지에게서 희망을 빼앗고 있습니다. 양말을 받던 업체에서 더 이상 양말을 받지 않겠다고 하고 납품한 양말 대금을 반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다섯 분 종업원 전부를 집으로 모시고 와서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식사 후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하신 퇴직금 봉투를 꺼내자 그분들이 '사장님, 저희 퇴직금으로 다시 한번 일어나세요'라고 해 아버지와 옆에서 보던 저와 어머니도 함께 울었습니다"는 사연이 담겼다.

◆ "서민 생활 모르는 건 아닌지"=송승환씨가 "어떤 분들은 서민 생활을 대통령께서 혹시 모르는 게 아닌가라고 한다"고 뼈있는 질문을 했다. 노 대통령은 "어려울수록 또 만사가 원망스럽고 그러다 보면 그렇게도 생각이 들 것"이라며 "그러나 대통령이 서민의 삶을 모르면 그건 정말 큰일이 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서민의 삶을 모르면 국가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 "행군할 때 중대장은 맨 앞장을 서고 인사계는 맨 뒤에서 앰뷸런스를 끌고 낙오자를 차에 태워 주사도 놓고 기운 차리게 해 다시 앞에 내려준다"며 "중대장보다 뒤에 차 타고 따라오는 인사계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노 대통령에게 전달해 달라는 절절한 서민들의 사연들이 이어졌다. "음식점이다. 오후 9시가 넘어도 한 테이블의 손님도 없다" "옛날엔 매일 일품을 팔았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한번꼴" "10만원 하는 신발을 1만, 2만원에 팔아도 안 산다" "애들 학원도 다 끊고 엄마들도 부업으로 뛰어요" "택시 사납금을 내 돈으로 넣을 때도 있다" 등.

이런 어려운 상황에 대한 노 대통령 나름의 분석을 제시했다. 노 대통령은 "통상적인 불경기와 특별한 이유로 골짜기가 깊어진 특별한 불경기가 있는데 지금 우리는 '특별한 불경기'를 맞고 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카드채로 인한 가계 부채 증대와 이로 인한 소비 부진을 그 이유로 들었다. 노 대통령은 "경제가 안 돌아가는 것이 문제지 전체적으로 우리 경제의 건강은 좋고 튼튼하다"며 "어려운 게 사실이고 금방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고 어느 나라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노 대통령은 "배 아플 때 병원 가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응급실에서도 기다려야 하고, 주사 맞는다고 벌떡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라며 "열심히 할 테니 나를 믿고 한번 희망을 가져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 "요행 바라지 않았다"=주택 문제에 대해 노 대통령은 "제도를 완전히 고쳐 집값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나 투기로 집값.땅값이 오르는 것만은 꼭 막아내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맞벌이 부부의 관심사인 보육 문제와 관련, 노 대통령은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는 사업"이라며 "내년 보육 예산을 50%(2000억원)나 올리는 등 이 부분은 정말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사교육에 대해 노 대통령은 "지금 낳는 아이들만큼은 학교 안에서 다 해결토록 해 절대 그 문제로 골치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면돌파의 승부사 기질이 있는 것 같다"는 송승환씨의 지적에 노 대통령은 "도박에선 기량도 중요하지만 역시 운이 따라줘야 하고 내가 대통령 권력 운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그 말도 맞는 것"이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나는 매 시기에 행운과 요행을 바라고 운명을 시험한 게 아니라 정말 진지하고 내 자신에 정직한 결정들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은 "오늘 사람 냄새가 나는 얘기들을 해본 것이 매우 기쁜 시간이었다"며 "희망도 있고 열심히 할 테니 국민들 힘내시라"고 마무리했다.

*** 한나라당 쓴소리 "경제 따뜻이 하려면 말이 아니라 실천을"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라디오 발언에 대해 국정 책임감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전여옥 대변인은 "이 혹독한 경제난에 고작 따뜻한 말 한마디 하기 위해 (방송에 출연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동안 전문 MC들이 수없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러곤 "추운 경제를 따뜻이 하려면 말이 아니라 실천을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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