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대작 마친 박중훈 "눈물연기로 확 잡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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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양들의 침묵' 을 연출한 조너선 드미 감독의 '찰리의 진실' (The Truth about Charlie)을 찍고 17일 파리에서 돌아온 박중훈(35)씨.

그는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제작비 5천만달러(약 6백50억원)의 할리우드 대작에 출연, 비중있는 역할을 맡아 마크 월버그.팀 로빈스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한국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기자에게 "입에서 단내가 난다는 게 뭔지 알고 왔다" 고 말했다. 그는 출국 전보다 한층 차분해졌고 촬영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전에 없는 비장함까지 느끼게 했다.

◇ 오기와 자존심

"제가 줄곧 주연만 해왔잖아요. 촬영 스케줄은 항상 제 위주로 짜여졌고 스태프들은 저를 우선 배려했죠. 하지만 그곳에서 전 고려 대상이 아니더군요. 월버그나 로빈스 중심으로 촬영이 진행되는데 총 촬영 60회 중 20회는 그냥 기다리기만 했으니까요. "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대사 연습을 할 때였다. 한국에서의 영화 촬영 때문에 출발이 늦었던 터라 대본 연습을 제대로 못한 데다 영어 대사가 익숙할 리 없었다.

"주변 분위기가 정말 싸늘하더군요. 영어도 못하는 웬 동양 배우가 와서 영화를 망치지는 않을까 하는 표정이었죠.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를 보고 캐스팅한 드미 감독이야 그를 믿었겠지만 할리우드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은 정말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더란다.

"인간적으로 참 힘들었어요. 흔들려선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죠.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생각도 했죠. "

'골프는 18홀을 끝내고 장갑을 벗을 때 승부가 결정 된다' . 이 말을 머릿속에 떠올린 그에게서 조급함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래 영화가 끝날 때 보자. "

그래서 그는 아파트에 돌아와서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영어 강사와 대사를 연습하고 탱고를 잘 춰야 하는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춤을 배우는 데 하루 서너 시간씩 투자했다. 파리로 날아갈 때의 화려했던 꿈은 오간데 없고 고생만 하는 그에게 남은 것은 오기와 한국 배우로서의 자존심뿐이었다.

◇ "다음엔 대사 더 주세요"

싸늘한 시선들을 단박에 물리친 것은 촬영이 시작되고 시간이 좀 흘러서였다. 극중의 동료가 교통사고로 죽는 날, 배우 탠디 뉴턴과 함께 눈물 흘리는 장면을 찍는 날이었다.

"영화를 많이 찍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아버지께 도와달라고 기도를 했지요. 상황이 어려웠던 만큼 절실했거든요. "

촬영이 끝나자 드미 감독의 눈이 붉어졌고 27년 경력의 여자 스크립터는 "연기를 보고 운 게 지금껏 세번째"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노력을 기울인 게 이것뿐이었을까. 시나리오를 보고 상처가 날 수밖에 없겠다 싶은 장면에 대비, 한국에서 약을 준비해 갔다.

실제 월버그와 계단에서 구르는 장면에서 어깨를 다쳤지만 현장 의사를 찾지 않고 일을 끝낸 뒤 집에서 파스를 붙이고 진통제를 먹었다.

그는 작은 흠이라도 잡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두고 지나친 '할리우드 콤플렉스' 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 말했다. "독하게 하는 수밖에…. "

모든 체증을 한꺼번에 씻어준 것은 드미 감독이 촬영 말미에 건넨 한마디였다. "내 다음 작품에도 출연해주시지. " 그는 이렇게 말을 받았다. "다음에는 대사 좀 더 많이 주세요" 라고.

◇ 월버그와 드미 감독

조너선 드미 감독, 배우 월버그와 친해진 것은 소중한 수확이었다. 특별히 연기 지시를 하지 않는 드미 감독은 큰 그림만 그려놓고 배우들의 연기력을 최대한 살리는 방법으로 영화를 이끌었는데 불만이 있으면 귓속말로 "이렇게 해야지" 라고 주문하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찰리의 진실' 중 월버그와 길거리를 힘차게 뛰는 긴 장면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감독이 설명했다고 한다.

월버그와는 주말에 함께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해졌는데 저우룬파(周潤發)와 '커럽터' 란 영화를 찍은 적이 있어서인지 그를 '중훈 박' 이 아니라 '박중훈' 이라 부를 줄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할리우드 배우들과 능력 차이는 별로 못느꼈습니다. 하지만 할리우드 배우와 한국 배우는 상업적 크기가 주는 차이는 있더군요. 그게 할리우드와 벌어져 있는 간격이라고 생각했지요. "

◇ 부러운 시스템

자연히 떨쳐 버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생각은 한국 시스템과 할리우드 시스템의 차이다. 주연이 아닌데도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환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속 분장사, 헤어 담당, 비서 역할을 하는 조감독, 개인 운전사, 촬영전 조명을 맞추기 위해 동원된 일본인 등. 무려 7~8명이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물론 그는 그게 인격적인 존중이 아니라 모든 에너지를 카메라에 담으라는 합리주의에서 나오는 것임을 잘 안다. 충무로 현실에선 바라지도 못할 일이다.

그 외에 시간을 정확히 지키며 밀도 있게 촬영 해 나가는 방식과 국내 영화보다 10배는 더 필름을 사용하는 것 등도 참 부러웠다고 말했다.

"비교를 하면 끝이 없죠. 이런 말 계속하면 할리우드에서 촬영한 게 뭐 그리 큰 자랑이냐고 사람들이 비웃지 않겠어요?

사실 저의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이 누구 덕인데요. 한국 영화의 힘 때문 아니겠어요. 그거 생각하면 할리우드 생각은 접어 두고 이제 고마운 사람들을 한번씩 둘러봐야죠. "

신용호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 '찰리의 진실'은…

할리우드 명감독 대열에 서 있는 조너선 드미가 연출하고 유니버설 픽처스가 제작한 '찰리의 진실' 은 지난 넉달 동안 파리에서 촬영됐다. 드미는 '양들의 침묵' 의 속편인 '한니발' 의 제작도 마다하고 이 영화를 택했다.

드미 감독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명세 감독)를 세 번이나 본 박중훈의 팬. 이번 작품에 박중훈을 적극 캐스팅했다. 그는 다음 작품으로 '인정사정…' 같은 스타일의 영화를 찍고 싶다는 말도 했다.

'찰리의 진실' 은 미국 국방부가 잃어버린 6백만달러짜리 다이아몬드의 행방을 놓고 벌어지는 스릴러. 박씨는 유고 내전에 참전한 경험 많은 미국 정부의 용병을 연기했다. 전체 분량 중 30% 가량에 나오는 비중 큰 조역이다.

'퍼펙트 스톰' '부기 나이트' 의 마크 월버그, '미션 임파서블2' 의 탠디 뉴튼, '쇼생크 탈출' 의 팀 로빈스 등 할리우드 톱 스타들이 함께 출연했다. 영어에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2년 간의 미국 유학 경험이 큰 힘이 됐다. 극중 이름은 '이일상' 인데 이는 박씨가 직접 지은 것.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의 이명세 감독의 성에다 2년 전 타계한 선친의 이름을 땄다.

출국 전 그가 촬영한 김성홍 감독의 스릴러 '세이 예스' 가 8월 중 개봉할 예정이며 향후 일정은 "좀 쉬는 것" 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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