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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 정체성을 부끄럽게 여기고 싶지 않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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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호 04면

“여자들은 예쁘다 싶으면 이미 결혼을 했고, 남자들은 잘생겼다 싶으면 모두 동성애자다.” 영국 출신 가수 로비 윌리엄스는 2000년 발표한 싱글 ‘수프림’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동성애자를 비하하자는 게 아니라, 모처럼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고도 이뤄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았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당황스러움을 이야기한 것뿐이다.

김수경의 시시콜콜 미국문화 - 리키 마틴의 커밍아웃

이 불길한(?) 징크스는 또 한번 들어맞았다. 노래 ‘리빈 라 비다 로카 (Livin’ la Vida Loca)’로 유명한 리키 마틴(사진)이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잘생긴 외모, 우람한 근육, 게다가 미혼이기까지 한 그를 보며 가슴 설렜을 전 세계 여성 팬들은 ‘아, 이렇게 또 한 사람이 가는구나’ 라며 씁쓸한 입맛을 다셔야 했다나 뭐라나.

한 동성애 관련 웹사이트는 그의 커밍아웃을 놓고 “이미 예견된 것”이라며 “어떤 이성애자 남성도 엉덩이를 그렇게 흔들지는 않는다”고 논평했다(그는 무대에서 노래에 맞춰 종종 엉덩이를 흔들곤 했다). 눈치 빠른 대중은 그의 성 정체성에 의문을 품었고 그는 늘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의 유명 여성 언론인 바버라 월터스는 2000년 리키 마틴과의 인터뷰에서 아무도 하지 못했던 바로 그 질문을 던졌다. 마틴은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그런 소문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한심한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고, 사람들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게 됐다(이후 다른 인터뷰에서는 동성애자임을 부인하며 그가 얼마나 여자와 섹스를 좋아하는지 강변하기도 했다).

월터스는 그가 커밍아웃할 것을 예견이라도 했는지 지난달 6일 캐나다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리키 마틴과의 인터뷰가 가장 후회로 남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마틴에게 동성애자가 아니냐고 집요하게 물었는데, 돌이켜보면 적절치 못한 질문이었다”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사실 그가 2008년 대리모를 통해 쌍둥이를 낳았을 때부터 사람들은 ‘동성애자가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 어려운 방식으로 아이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여성으로부터 난자를 기증받은 뒤 자신의 정자와 수정시켜 또 다른 여성의 자궁을 통해 아이를 낳았다.

그는 최근 자서전 출간을 준비하면서, 문득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에 커밍아웃을 결심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커밍아웃의 타이밍을 두고 자서전 판매를 노린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지만 글쎄, 단지 상업적 이유로 그런 모험을 감행했다고 보기에 세상은 아직 동성애자들에게 잔인한 곳이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내가 동성애자임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한편으론 동성애자면 동성애자이지 자랑스러울 건 또 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이성애자인 것이 딱히 자랑스러울 일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도록 강요한 사회에 대한 항변이라고 생각하면 그의 자긍심은 정당한 것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끊임없이 누군가 내 성 정체성을 의심하고 그럴 때마다 번번이 내가 얼마나 남자와 섹스를 좋아하는지 증명해야 하는 삶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미국의 한 언론은 마틴의 커밍아웃을 두고 그의 노래 제목을 패러디해 ‘리빈 라 비다 리버레이티드 (Livin’ la Vida Liberated·해방된 삶)’라고 했다. 그가 앞으로 저급한 호기심에서 ‘해방된 삶’을 살길 기원한다.


일간지에서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유학하고 있다. 음악과 문화 등 대중문화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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