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속(俗)’을 ‘성(聖)’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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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가톨릭’으로 불리는 천주교는 보편적인 교회다. ‘가톨릭’이라는 말 자체가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기에 성장주의자도 녹색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그 신념과 관계없이 신앙을 가질 수 있고, 또 이 둘을 합한 ‘녹색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도 성당에 다닐 수 있다. 그런 천주교에서 ‘가톨릭다움’을 훼손하는 이상한 일이 최근 벌어졌다. 4대 강 사업이 자연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으로 우려한다는 주교단의 의견서가 발표된 것이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언제부터 교회가 수자원과 토목학의 영역에 관여하기 시작했는가. 4대 강 사업에 찬성하는 신자들은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인가. 물론 세속적인 일이라고 해서 교회가 나설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낙태나 인권 문제에서 교회는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4대 강 사업 반대 의견도 그런 유형의 판단이란 말인가.

권위주의 시대라면 모를까 민주화 시대가 됐음에도 가톨릭의 일부 신부는 ‘하느님의 일’이 아닌 ‘카이사르의 일’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사제복을 입고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참여하는가 하면,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정치 활동을 해온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이번 의견서 발표에 큰 역할을 한 주교회의 산하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이 그랬다. 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시민단체의 일에 나서는 신부도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신자가 신부들의 과도한 사회 참여에 대해 침묵을 지켜온 것은 그 참여 행동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교회가 분열의 모습으로 비치는 것, 속된 무리처럼 서로 아옹다옹하는 저급한 집단으로 비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부들이 왜 저래” “교회가 왜 저래”라고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은 있었으나 큰소리는 내지 않았다.

아마도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진짜 어머니의 심정이 그랬으리라. 살아있는 아이를 두고 다투는 상황에서 솔로몬은 아이를 반으로 나눠 가지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가짜 어머니는 둘로 나누자고 했지만 진짜 어머니는 자기가 가지지 않아도 좋으니 온전한 모습으로 상대편에게 주라고 했다. 지금 많은 신자가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해 느끼고 있는 불편한 마음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성(聖)’과 ‘속(俗)’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정의평화위원회의 활동이 못마땅하지만 목소리를 냄으로써 교회 공동체를 찬성과 반대의 둘로 나누기보다는 참음으로써 가톨릭 공동체를 온전한 공동체로 보전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많은 신자의 그런 선의를 과연 사회 참여 신부들은 짐작이나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지금은 가뜩이나 언로(言路)가 개방돼 있어 신부나 주교도 개인 자격으로 얼마든지 세속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공식적으로 나서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다. 그것은 교회가 절대 그르침 없이 신앙과 윤리 문제를 판단하는, 이른바 ‘무류지권(無謬之權·infallibility)’을 행사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대 강 사업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과 윤리의 영역이 된다는 말인가.

주교단 의견서를 통해 교회가 일부러 신자들을 오도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양떼를 거느리고 있는 목자가 양떼를 알면서 잘못 인도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목자도 ‘속’의 일을 ‘성’의 일로, ‘과학’의 영역을 ‘신앙’의 영역으로 착각하는 등 스스로 무지나 오류에 빠질 수 있는 만큼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책무는 있다.

이번 의견서처럼 4대 강 사업을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나 환경주의자만이 진정한 ‘가톨릭교회다움’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부나 주교가 있다면, 말을 보고 사슴이라고 하거나 고래를 보고 물고기라고 하는 어리석음에 비견될 만큼 신앙과 과학을 혼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생명의 말씀을 듣고자 성당에 갔는데 뜻밖에 세속적인 4대 강 이야기를 들으니 그 참담한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어 산 정상에 올라갔는데 난데없이 역한 쓰레기 타는 냄새를 맡게 되는 당혹스러움과 무엇이 다르랴. 신자는 성당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듣고 싶은 것이지, 평소에도 수십 번씩 식상할 정도로 듣는 세속 이야기를 또 듣고 싶어 하는 게 아님을 교회는 알아야 할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