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량의 월드워치] 영 노동당의 숙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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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영국 총선은 예상대로 노동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노동당은 1백년 역사상 처음으로 2기 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승리의 주요인은 경제였다. 현재 영국은 연 3%대 성장, 25년래 최저인 물가 그리고 사상 최대 규모의 재정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실업률은 5% 이하의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보수당의 자멸적(自滅的) 선거 전략도 한 몫 했다. 보수당이 야심적으로 내놓은 80억파운드 감세 공약은 공공 서비스 확대를 바라는 유권자들에게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 참가 반대를 내용으로 한 애국주의 공세도 노동당의 국민투표 역공(逆攻)으로 별 효과가 없었다. 막판에 들고 나온 노동당 압승 경계론마저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이번 총선은 이념이 배제된 선거였다. 이데올로기보다 표를 모을 수 있는 현실정책이 중요했다. 노동당은 보수당의 메뉴인 공공서비스 민영화.기업중시 정책을 선점(先占)했다. 정치 분석가들은 이를 노동당의 보수당화(化)라고 지적했다.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토니 블레어 총리를 "영국에서 유일하게 신용할 수 있는 보수 정치인" 이라고 꼬집었다.

노동당의 탈이념화는 갑작스런 일이 아니다. 1979년 이후 총선 4연패 수모를 겪으면서 변신을 시도했다. 83년 당수가 된 닐 키녹은 노동당의 과격한 정책을 포기했다. 92년 키녹을 이은 존 스미스는 '1인 1표' 의 당내 민주화로 노조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94년 스미스의 급서(急逝)로 당수가 된 블레어는 '뉴 레이버(새로운 노동당)' 를 내걸었다. 당 강령 제4조에서 '생산수단의 공유' 를 삭제, 노동당은 기업가-노동자 동맹정당으로 탈바꿈했다.

뉴 레이버는 현대적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한다. 보수당의 신자유주의도, 올드 레이버의 국가개입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이다. 보수당은 '영국병' 을 치유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빈부격차 확대, 사회복지 축소로 서민층에 고통을 안겨줬다. 뉴 레이버는 시장원리와 경쟁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공정.기회균등을 추구한다. 제3의 길은 97년 총선에서 보수당의 18년 장기집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3의 길이 효력을 발휘했는가에 대해선 평가가 다르다. 노동당 집권 4년이 지난 지금 영국은 유럽 선진국 가운데 소득 불평등이 가장 심하며, 빈곤층의 생활 수준은 그리스.포르투갈과 비슷하다. 의료.교육.교통.치안 등 공공 서비스도 열악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선 블레어를 '대처의 가장 충실한 후계자' 라고 혹평한다.

정치에 대한 영국인들의 실망은 1918년 이후 최저라는 투표율 58%에 잘 나타나 있다. AFP통신은 이번 선거의 최대 승자는 '무관심' 이라고 평가했다. 노동당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는지 앞으로 '머리와 가슴의 정치' 를 펴겠다고 다짐했다. 차기 노동당 정부에서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얼마나 조화를 이룰지 지켜보자.

정우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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