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문화재정책] 下. 고쳐야 할 국민 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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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조상이 남겨준 문화재를 두고 값이 얼마나 되느냐를 따지는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은 사실 문화재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문화재가 지닌 가치와 역사성을 헤아리기 전에 '가격이 얼마나 될까' 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가짐으로는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보존하기 힘들다.

"경제발전으로 소득 수준은 높아졌지만 문화재 의식은 별반 나아진 게 없다. 문화재 값을 따지기 전에 자긍심을 먼저 지녀야 이를 제대로 보존할 수 있는데 아직은 재산 가치로서만 문화재를 보는 경향이 뚜렷하다. " 문화재계에 몸담고 있는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런 문제는 불교 사찰과 더불어 우리 문화재를 대량으로 보관하고 있는 각 문중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문중에서는 유물들을 보존하느라 신경을 쓰기는 하지만 문중 구성원간의 알력과 관리 소홀로 귀중한 유물들이 분실되거나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

문화재청의 한 관계자는 "문중에서 문화재를 두고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이로 인해 문화재 일부를 목소리 큰 사람이 가져다가 처분하는 사례도 있다" 며 "문중에서 자발적으로 유물 관리를 잘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고 말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김학수(金鶴洙.35)연구관은 "문중 관리 유물은 관리도 소홀할 뿐 아니라 절도범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고 있다" 며 "현대사회에서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종가(宗家)의 기능이 점차 약해지면서 소장 유물의 관리가 부실해지고 분실 위험성도 커지고 있다" 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4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박세당(朴世堂) 문중이 소장 유물 모두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기탁키로 결정한 것(본지 5월24일자 18.30면)은 참신한 사례로 손꼽힌다.

박세당의 11대 종손인 박찬호(朴贊鎬.79)씨는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던 귀중한 유물 가운데에는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르는 게 퍽 많다" 며 "보존에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는 국가기관에 맡겨서라도 이를 보존해야겠다는 마음에서 현재 소장하고 있는 유물을 맡기기로 했다" 고 말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측은 "박씨 문중의 기탁으로 영호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경기지역의 문서들을 대량으로 확보하게 됐다" 며 "유물 기탁으로 연구 기능이 활성화할 것으로 보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경우는 아직 극소수에 해당한다. 특히 지역개발을 둘러싼 주민들의 '내 것' 에 대한 의식이 완고해 문화재행정당국이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문화재청은 세계 5대 해안 사구(砂丘)로 꼽히는 충남 태안의 신두리 모래언덕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키로 했지만 주민들이 지역개발에 장애가 된다며 거세게 반발해 애를 먹었다. 또 지난해 10월에는 충남의 한 절 앞에 상가를 짓는 문제를 두고 문화재청의 직원들이 지역주민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한 관계자는 "해당화 군락지이고 희귀한 모래 언덕인 신두리 지역을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했으나 주민들 반발로 대상지역을 1백만평에서 46만평으로 줄였다" 며 "이밖에도 근대 시기 유적지나 건축물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려 해도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 제대로 업무를 추진할 수 없는 상황" 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의 한 직원은 "국민들이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는 있지만 막상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충할 때는 태도가 달라진다" 며 "문화재는 '내 것' 이 아니고 공공의 성격을 띤 역사 유물이라는 인식이 좀 더 확산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자금과 문화재 행정 인력 부족에다가 국민들의 취약한 문화재 보존 의식이 더해지면서 우리 문화재가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는 게 관계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 소유의 사적지나 건축물을 국가에 위탁해 관리토록 하는 영국의 '국민문화유산 신탁(내셔널 트러스트)' 등 선진적인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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