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미국의 선택] 1. 왜 다시 '부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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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전 6시 미국 동부에서 투표가 시작됐을 때 공화당은 경악했다. 투표소가 문을 열기도 전에 수많은 유권자가 몰려와 미리 장사진을 치는 보기 드문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중북부의 최대 접전주인 오하이오의 경우 비가 쏟아졌지만 투표 행렬은 줄어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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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선 캠프엔 비상이 걸렸다. 투표율이 높으면 민주당이 유리하다는 게 정설이다. 게다가 대학생 등 2000년 이후 새로 투표권을 얻은 18~24세 유권자층이 대거 투표장에 나온 것으로 알려지면서 민주당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투표일 직전까지의 분위기도 민주당 존 케리 후보의 상승세가 뚜렷하다는 게 거의 모든 선거 전문가의 전망이었다.

"압승이 예상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케리 캠프는 잔칫집이 됐고, 부시 캠프는 초상집으로 변했다.

하지만 정작 개표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반전했다.

젊은층이 대거 투표장에 나오고 1억1500만명 이상이 투표하면 케리가 이긴다는 가설은 깨졌다. 현직 대통령의 직무 수행 지지도가 50% 이하면 재선이 안 된다는 속설도 무너졌다. 출구조사는 2000년 대선 때보다 더 망신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미 전역에서 350만표 이상의 큰 표 차로 케리 후보를 앞서고, 케리가 이겼다던 플로리다에선 5%포인트 차이로 여유있는 승리를 한 것이다.

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미 선거 전문가들은 갖가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우선 미 국민에게는 이번 선거에서 테러와 안보 문제가 가장 강력한 관심사였다는 지적이다. 테러-이라크전쟁-경제 순으로 유권자들이 후보자 선택 기준의 우선 순위를 매긴 것이다.

게다가 선거를 5일 앞둔 시점에서 또 다른 테러를 경고하는 오사마 빈 라덴의 비디오테이프가 전격 공개된 것도 국민의 안보 경각심을 크게 고조시켰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 전쟁 중인 대통령이고,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심리가 작동한 것이다. 지난 4년간 20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어 경제에 대한 불만이 미국 내 50개 주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오하이오에서조차 부시 대통령이 앞선 것은 이번 선거의 쟁점이 경제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케리 후보는 지지자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출구조사 결과 케리 후보를 찍은 유권자는 60%만이 '케리가 좋아서'라고 답했다. 나머지 40%는'부시가 싫어서'였다. 반면 부시 대통령에게 투표한 유권자는 80% 이상이 그가 좋아서 찍었다고 했다. 대선 TV 토론을 통해 케리 후보는 부시 대통령보다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한다는 사실을 입증했지만 유권자들은 어수룩해 보이는 부시 대통령에게서 오히려 인간적인 호감을 더 느꼈다는 의미다.

또 부시의 승리에는 미국 내에서 인구가 급속히 팽창하고 있는 히스패닉계가 큰 역할을 했다.

히스패닉계 인구가 가장 많은 뉴멕시코주는 2000년 대선 때는 부시가 아니라 고어 후보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선 부시가 51% 대 48%로 비교적 여유있게 케리를 따돌렸다. 플로리다주의 히스패닉계도 4년 전엔 부시와 고어를 반반씩 지지했지만 이번에는 54% 대 46%로 부시를 더 지지했다. 이번 선거에선 '히스패닉계=민주당 지지'의 등식 역시 깨진 것이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강력한 우군인 흑인 10% 정도가 9.11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 쪽으로 돌아선 것도 케리 후보에겐 큰 악재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공화당의 전략이 민주당보다 한 걸음 앞섰다는 게 중론이다. 부시 캠프의 홍보 담당인 캐런 휴스는 2일 투표가 끝난 뒤 "플로리다주의 투표율이 올라갔을 때 대부분 민주당의 승리를 점쳤지만 이는 공화당 역시 수많은 지지자를 투표장에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투표율 상승이 민주당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게다가 부시 캠프는 특히 2000년 투표하지 않았던 400만명의 우익성향 기독교인을 집권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관리해 왔고, 이들의 투표 참가가 부시 측에는 큰 힘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어째서 출구조사가 그렇게 엉터리였는지에 대해선 미 언론들조차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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