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고 김종달 일본 유고그룹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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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달 26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한 전 일본 유고그룹 회장 김종달(金鍾達)씨.

그의 삶에는 민족차별을 꿋꿋이 이겨내고 자수성가한 재일교포 1세대의 수구초심(首邱初心)이 짙게 배어 있다.

온갖 고생 끝에 고인이 창업한 유고그룹은 현재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빠찡꼬장.대형 목욕탕 등 24개 사업장과 로열호텔을 갖고 있다. 연간 매출액은 2천억원대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성공한 뒤에도 일본으로 귀화하라는 회유와 압력을 과감히 뿌리쳤으며 고향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경북 청도군 각북면 명대리에서 빈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17세 때 모진 가난을 벗기 위해 일본의 광원 모집에 자원, 단돈 5전을 들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는 생전에 "빵 한개와 우표 한장 값이 3전씩이었는데 일본에 도착해 고향에 안부 편지를 부치고 나니 빵값이 모자라 굶을 수밖에 없었다" 고 당시 상황을 회상하곤 했다.

그는 오사카에서 광원으로 6개월 남짓 지내다가 한 철공소에서 사지(死地)로 끌려갈 운명과 맞닥뜨렸다. 군속영장을 받아 동남아전선에 징집될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를 아끼던 한 일본인이 귀띔해준 덕분에 나고야로 달아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일본 전역을 떠돌며 엿.쌀장사 등으로 끼니를 이었다. 1940년엔 당시 금지된 소장사를 하다 발각돼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45년 일제 패망과 함께 풀려난 그는 한과류 도매상점을 열었다. 이를 바탕으로 50년에는 빠찡꼬업에 진출해 유고그룹의 근간을 마련했다. '일본인을 이기겠다' 는 신념 하나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다.

갖은 불이익을 감수하며 끝내 한국인으로 남은 金씨의 고집스런 조국사랑과 뿌리의식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일본인과 결혼해선 안된다" 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두 아들과 외동딸.손자들은 모두 한국국적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아들 용해(龍海)씨는 "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겐 강요하기 어렵다" 고 털어놓았다.

그는 20년 전 회사를 아들에게 맡기고 고향 일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명대리에 1백평 규모의 집을 마련한 그는 "뿌리없는 나무는 죽을 수밖에 없다" 며 1년에 십여 차례 고향을 찾았다. 그 때마다 동네 노인들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곤 했다.

10여년 전부터는 매년 청도 군민들을 일본으로 초청했다. 일본인의 친절이나 질서 의식만큼은 배울 만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고인은 자식들을 불러 자택을 찾은 고향 어른들에게 한국식으로 큰절을 올리게 하고 음식을 손수 마련했다. 지금껏 다녀온 사람은 1백명 정도.

그는 돈을 들여 고향마을 진입로를 확장 및 포장했으며 군민회관 건립 등에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 올림픽공원 조성 때는 1억엔을 기부하기도 했다. 2년 전에는 청도 소싸움대회에 출전할 일본 소 세 마리를 실어나르는 비용 6백50만엔을 부담해 한.일 소싸움대회를 성사시켰다. 장의위원장을 맡은 김상순(金相淳)청도군수는 영결식장에서 이 대목을 읽다 끝내 목이 메었다.

고인은 지난달 초 청도 소싸움대회에 참석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 뇌졸중으로 쓰러져 삶을 마감했다. 그리곤 현해탄을 건너와 그토록 사랑했던 고향 명대리에 누웠다. 생전에 자랑스러워하던 김해 김씨 종친회 참봉직 예복에 둘러싸인 채.

청도=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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