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살빼기의 사회병리 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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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나라는 지금 체중감량과 다이어트 열풍에 휩싸여 있다. 비만치료제를 원하는 여성이 넘쳐나고 다이어트 상품광고가 난무하며 다이어트 사이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인기 개그우먼 이영자씨가 달리기와 걷기, 식이조절로 36㎏의 체중을 감량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세간의 화제가 됐다.

***상업주의 다이어트 열풍

여성들 사이에 살빼기 열풍이 불면서 이영자씨의 다이어트 비디오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고 이영자씨가 둘렀다는 얼굴밴드(땡김이)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란다. 조깅화의 매출이 급신장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동네에 나가보아도 뛰는 사람이 월등히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자 다이어트에는 속임수가 있다는 한 성형외과 의사의 폭로와 李씨가 살을 빼기 위해 지방흡입술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분노와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곧 밝혀지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살빼기를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가 아니라 李씨가 수많은 젊은 여성들의 다이어트 열풍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이다.

다이어트 열풍이 계속되는 한 다이어트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거식증.폭식증 같은 병의 약 80%가 다이어트로 인해 생긴다는 외국의 연구가 있다.

이런 어두운 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상체중을 가진 여성에서 다이어트는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 감량된 체중이 일시적 만족감과 자신감을 주지만 손해는 훨씬 심각하다. 무리한 다이어트를 지속하면 골다공증.결핵.위장장애.수면장애 같은 신체적 질환과 다이어트노이로제.체중공포증.음식혐오증.불안증.우울증.대인공포증.거식증.폭식증 같은 정신적인 질병상태가 초래된다.

체중조절의 진실은 무엇일까? 첫째, 현재까지 확실하고 안전한 체중조절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단기간에는 살이 빠지지만 그 체중을 오랜 기간 유지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라는 사실이다. 셋째, 신체는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체중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아주 강하다는 사실이다. 넷째, 모델들이 보여주는 체중은 건강한 체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체중감량의 싸움 와중에서 자책과 실망, 열등감이 심해지며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유행을 창조하는 것이 패션산업이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광고산업이며 그것을 극대화하는데 일조하는 것이 방송.신문.잡지 같은 언론매체다.

패션산업, 광고산업, 언론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성이 없는 허구의 여성상이 판을 치면서 정상체중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 열등감에 시달리고 너도나도 다이어트 전쟁에 나서고 있다. 이 다이어트 전쟁에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이 희생되고 있다.

이 세 집단이 이러한 소모적인 다이어트 전쟁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상업주의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양심과 원칙이 준수돼야 한다는 것이다. 다이어트의 장기적인 효과 여부와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심각한 부작용들에 대해 알려야 한다. 그 후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모델 기용 때 신중했으면

영국의학협회 보고서는 "모델들이 보여주는 깡 마른 몸매는 현실적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수준일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부적절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이상적인 체형이 될 수 없다" 고 경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업계와 광고업계는 비쩍 마른 모델을 선호함으로써 여성들의 거식증.폭식증 같은 식이장애를 부추기고 있다. 이런 면에서 영국 여성청에서 패션 전문가와 모델, 언론매체의 영향력 있는 전문가를 불러놓고 현실감 있는 체형의 모델을 기용해 주도록 촉구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체중 조절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다이어트 전쟁이라는 소모전에 휘말리지 말자. 이영자씨 사건과 같은 다이어트 열풍의 이면에는 우리의 딸들을 현혹시키는 속임수와 상업적인 계산과 무책임이 있다. 다이어트 산업 및 이와 관련된 전문가들이 함께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대책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실적인 체형의 모델을 기용해 현실적인 정상체중을 수용하는 노력들도 다이어트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이어트의 열풍을 잠재우자.

강희찬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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