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나라당의 전향적 남북관계법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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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이 북한의 법적 실체를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남북관계기본법안'을 선보였다. 요지부동으로 변화의 조짐조차 없던 한나라당에서 이런 전향적 법안이 나왔다니 신선하기까지 하다. 물론 당내의 보다 보수적인 의원들의 반발을 극복해야 하는 등 당론으로 채택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고, 헌법 및 국가보안법과의 상충 여부에 대한 법리적 검토도 거쳐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발상의 전환이야말로 정치의 맛이요 멋이다.

한나라당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의 뚜렷한 메시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현실에 안주했으며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실수와 실책에서 얻어진 반사이익을 챙기는 데 급급했다. 그래서는 '작은 선거에선 이기고, 큰 선거에선 지는' 모습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건 제1야당인 한나라당의 불행일 뿐 아니라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한 국민의 불행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현 집권세력에 실망하고 분노한 국민조차 한나라당을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이르렀겠는가.'잊혀진 정당'이라느니 '꼴통수구'니 하면서 놀림을 받아도 반박할 수 없었던 게 오늘날 한나라당의 처지였다.

법안은 이런 한나라당도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열린우리당이 국회에 제출해놓고 있는 법안에서는 북한은 '북한 당국'이라고 표현했지만, 정 의원의 법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북한 정부'로 명시했다. 남북한을 '통일 이전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규정했다. 북한을 정부로 인정하고 그 국호를 사용한 것은 정 의원의 법안이 처음이다. 민간인과 공무원의 상호 파견 근거도 마련했다. 과거의 무조건 답습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선도하려는 노력을 보일 때 비로소 보수가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법안은 안보에 대한 국민적 불안을 최소화하는 장치를 갖췄다.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변화한 남북관계를 반영해 북한을 교류협력의 동반자로 인정하면서도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이라는 점도 분명히 한 것이다. 또 일정 규모 이상의 대북 지원은 국회 동의를 거치도록 했다. 이런 식의 접근이라면 국가보안법 역시 타협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면서도 북한의 통일전선 전략이 남한 내에서 통용될 수 없도록 철저히 막아내는 장치에 합의하면 문제가 없다.

여당 내에서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이 강성개혁파에 제동을 걸 듯, 한나라당 내에서도 합리적인 보수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여아 간에 합리적 대화와 의견 조정이 가능하다. 명분에 묶여 있기보다 나라의 앞날에 무엇이 유익한지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접점은 찾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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