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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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장좌불와(長坐不臥.밤에도 눕지 않고 앉아서 수행)를 오래 한 탓인가. 성철스님은 편안히 누워 입적하지 않고 앉아서 숨을 거두는 좌탈(坐脫)을 택했다. 보통 사람들이 누워 있는 것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아침 7시, 마주댄 어깨 사이로 아주 조금씩 온기가 사라지는 느낌에 비로소 큰스님을 자리에 눕혔다. 부처님이 그랬듯이 머리는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밤새 마음으로 준비한 열반인지라 가슴 속에 솟구치는 감정의 응어리는 없었다.

선사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여러가지이지만 남은 문도(제자)들이 그 주검을 거두는 과정은 한가지다. 절집에선 '다비(茶毘)' 라는 이름으로 화장을 한다. 다비란 말 자체가 태운다는 뜻의 범어. 윤회(輪廻)를 믿기에 죽음이란 단지 육신이라는 옷을 바꿔 입는 데 불과하다. 또 육신이 그렇게 공(空)한 것이기에 깨끗하게 태워 없애는 게 맞다.

의미가 그러하니 형식도 단출해야 맞다. 다비식은 산중의 스님들끼리 조용히 치르는 것이 관례다. 내가 1972년 해인사로 출가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목격한 다비식도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처음 다비식을 본 느낌은 솔직히 "절집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원시적으로 장례를 지내나" 하는 의문이었다.

평상보다 작은 쇠틀을 짜놓고 그 위에 관(棺)을 얹은 뒤 나무를 쌓고 태우는 방식이다. 보기에 민망한 것은 관을 놓고 나무를 쌓는 과정에서 인부들이 관을 밟는 모습이다. 그 광경을 손님들이 한시간 넘게 지켜봐야 하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간혹 쌓아놓은 나무가 쓰러지거나 무너지는 불상사도 있다. 잘 타게 하기 위해 바닥에 숯을 채우고 참나무 장작에는 기름을 뿌리는데, 바람에 불길이 날려 한쪽이 덜 타 애를 먹이기도 한다.

성철 스님의 상좌로 어차피 다비식을 준비해야할 처지인지라 나는 일찍부터 이런 문제를 고민했다. 그래서 어디서 큰스님의 다비식이 있다면 달려가 아이디어를 얻곤 했다. 그 결과 얻은 것이 거푸집을 만드는 방식이다. 관이 들어갈 만한 공간을 미리 만들어 놓은 뒤 장작을 쌓고, 다시 광목으로 바깥을 싸 연꽃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대성공이었다. 92년 2월 해인사 총무를 맡아보던 나는 성철 스님의 도반(道伴.구도행의 동료)인 자운스님의 다비식에서 이 방식을 시험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화대(蓮花臺.연꽃모양 다비대)가 탄생했다.

한겨울 큰 연꽃 속에 스님의 주검을 순식간에 감추고 불을 댕기자 문상 온 손님들이 "장엄하다" "여법(如法.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하다" 며 감탄했다.

그런데 정작 성철스님한테선 꾸중을 들어야 했다. 당시 성철스님은 관절염이 심해 요양차 산중을 떠나 부산의 한 신도가 마련해준 토굴(임시거처)에 머물고 있었다. 스님을 문안한 자리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놈아, 어째 그래 하노. …내도 얼마 안있어 갈낀데, 그 때는 그래 시끄럽게 하면 안된다. "

물론 일부에서 화려하다는 지적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다비식은 "잘해도 욕먹고, 못해도 욕먹는 일" 이라고 한다. 많은 스님들이 "다비식을 초라하게 하면 그 문도들한테 평생 한 맺힌 원망을 듣기 때문에, 차라리 화려하다고 욕먹는 게 낫다" 며 나를 위로했다. 그러던 차에 큰스님의 불호령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그런데 정작 성철스님이 돌아가시자 마음이 흔들렸다. 가르침에 따라야한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내심 걱정이 됐다. 사실 나는 해인사가 워낙 산골이라 조문객이 얼마 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82년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스님이 입적했을 때 추모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는데, 당시 "스님의 법력이 대단하다" 는 소리가 자자했기 때문이다. 내가 장례식을 잘못해 스승 성철스님이 법력이나 덕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무엇보다 걱정이었다.

기우(杞憂)였다. 아침 7시30분쯤 조계종 총무원에 종정의 열반을 알렸는데, 8시쯤부터 방송에 속보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스님의 열반을 확인하려는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다.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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