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8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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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80. 연재를 마치며

뭐니 뭐니 해도 나라가 잘 돼야 한다.

1970년대 초 런던에서 재무관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우연히 어느 은행 앞을 지나는데 김일성(金日成)배지를 단 사람이 걸어나왔다. 경위를 알아봤더니 이 은행이 북한과 차관계약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려워 돈을 꿔 달라고 했을 때 거절한 은행이었다.

그 후 내가 재무부 장관으로 있을 때 유럽코리아 펀드를 설립하게 됐다. 이 사건은 우리가 유럽에 진출한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간사 은행으로 70년대 북한에 차관을 공여한 바로 그 은행이 선정됐다. 나는 당시 우리에게 돈을 꿔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간사 은행을 교체했다. 어려울 때 도와 준 은행들을 제치고 그 은행에 인가를 내 줄 수는 없었다.

그에 앞서 우리 기업들이 중동에 한창 진출할 때였다. 나는 외환은행이 지급보증을 설 수 있게 해 달라는 교섭을 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앙은행 사마를 드나들었다. 당시 파키스탄인이었던 사마의 크라이시 총재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 시절 중동에 다녀오는 데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렇게 가서 비서와의 교섭 끝에 그를 잠깐 만나고는 곧바로 돌아서곤 했다. 훗날 내가 재무장관 때 그가 쿠웨이트 민간 투자은행 설립 교섭차 방한했다. 나는 옛날 일을 떠올리며 그에게 저녁을 융숭히 대접했다.

한평생 나는 두 가지를 꾸준히 하며 살아 왔다. 그 하나가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독서다. 이 두 가지는 사람을 리버럴하게 만드는 공통점이 있다. 얼마 전 읽은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나이 육십이 되면 없어지는 것이 일곱가지 있다. 직장.타이틀.돈.정보.인간관계.가족.건강. 노후대책이란 바로 이 일곱가지가 자신에게서 천천히 떠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

저자는 그러면서 육십오세가 되면 하기 싫은 것은 아예 하지 말라고 권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을 연재하는 동안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가 하기 싫은 것은 고사하고 남이 싫어할 소리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특히 실명(實名)으로 지인들을 들먹인 것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 싶다. 이미 밝힌 대로 나는 "공인에게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 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밝혀지게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비록 역사의 주역은 못되지만 역사의 생생한 증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마지널한 세대다. 바로 윗 세대가 굴절된 역사의 희생자였다면 우리는 정상화로 가는 혼란기를 뚫고 살아 왔다. 관료로서 '좋았던 시절' 은 지나갔지만 지금 공직자들에게는 민주화된 사회에서 민주적인 관료로 대성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경제정책이란 결국 제한된 자원을 어떤 우선순위로 배분하느냐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없지만 완전히 새로운 결론이란 있을 수 없다. 하늘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일찍이 맥아더 원수가 설파했듯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

"늙은이여, 입을 열자" 고 했지만 막상 입을 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빛바랜 스냅 사진처럼 기억이 희미해져 사실을 복원해 내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기자의 도움도 받았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동시대인들 특히 공직에 있는 후배들에게 삶의 기록을 남기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흔적은 대성한 사람에게 더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자신의 머리를 과신하지 말라.

신변잡기에 불과할 수도 있는 얘기들을 읽고 격려를 해 준 독자들에게 마지막회 지면을 빌려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다섯 달 동안 귀한 지면을 할애해 준 중앙일보에 감사 드린다.

※6월 1일 금요일자부터는 성철 스님의 삶을 되돌아 보는 '산은 산 물은 물' 이 연재됩니다. 뭐니 뭐니 해도 나라가 잘 돼야 한다.

1970년대 초 런던에서 재무관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우연히 어느 은행 앞을 지나는데 김일성(金日成)배지를 단 사람이 걸어나왔다. 경위를 알아봤더니 이 은행이 북한과 차관계약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려워 돈을 꿔 달라고 했을 때 거절한 은행이었다.

그 후 내가 재무부 장관으로 있을 때 유럽코리아 펀드를 설립하게 됐다. 이 사건은 우리가 유럽에 진출한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간사 은행으로 70년대 북한에 차관을 공여한 바로 그 은행이 선정됐다. 나는 당시 우리에게 돈을 꿔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간사 은행을 교체했다. 어려울 때 도와 준 은행들을 제치고 그 은행에 인가를 내 줄 수는 없었다.

그에 앞서 우리 기업들이 중동에 한창 진출할 때였다. 나는 외환은행이 지급보증을 설 수 있게 해 달라는 교섭을 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앙은행 사마를 드나들었다. 당시 파키스탄인이었던 사마의 크라이시 총재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 시절 중동에 다녀오는 데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렇게 가서 비서와의 교섭 끝에 그를 잠깐 만나고는 곧바로 돌아서곤 했다. 훗날 내가 재무장관 때 그가 쿠웨이트 민간 투자은행 설립 교섭차 방한했다. 나는 옛날 일을 떠올리며 그에게 저녁을 융숭히 대접했다.

한평생 나는 두 가지를 꾸준히 하며 살아 왔다. 그 하나가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독서다. 이 두 가지는 사람을 리버럴하게 만드는 공통점이 있다. 얼마 전 읽은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나이 육십이 되면 없어지는 것이 일곱가지 있다. 직장.타이틀.돈.정보.인간관계.가족.건강. 노후대책이란 바로 이 일곱가지가 자신에게서 천천히 떠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

저자는 그러면서 육십오세가 되면 하기 싫은 것은 아예 하지 말라고 권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을 연재하는 동안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가 하기 싫은 것은 고사하고 남이 싫어할 소리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특히 실명(實名)으로 지인들을 들먹인 것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 싶다. 이미 밝힌 대로 나는 "공인에게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 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밝혀지게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비록 역사의 주역은 못되지만 역사의 생생한 증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마지널한 세대다. 바로 윗 세대가 굴절된 역사의 희생자였다면 우리는 정상화로 가는 혼란기를 뚫고 살아 왔다. 관료로서 '좋았던 시절' 은 지나갔지만 지금 공직자들에게는 민주화된 사회에서 민주적인 관료로 대성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경제정책이란 결국 제한된 자원을 어떤 우선순위로 배분하느냐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없지만 완전히 새로운 결론이란 있을 수 없다. 하늘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일찍이 맥아더 원수가 설파했듯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

"늙은이여, 입을 열자" 고 했지만 막상 입을 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빛바랜 스냅 사진처럼 기억이 희미해져 사실을 복원해 내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기자의 도움도 받았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동시대인들 특히 공직에 있는 후배들에게 삶의 기록을 남기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흔적은 대성한 사람에게 더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자신의 머리를 과신하지 말라.

신변잡기에 불과할 수도 있는 얘기들을 읽고 격려를 해 준 독자들에게 마지막회 지면을 빌려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다섯 달 동안 귀한 지면을 할애해 준 중앙일보에 감사 드린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6월 1일 금요일자부터는 성철 스님의 삶을 되돌아 보는 '산은 산 물은 물' 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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