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알 권리 앞세운 독언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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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주 독일에선 좀처럼 전례를 찾기 힘든 외교적 해프닝이 벌어졌다.

지난 3월 말 미국을 방문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과 나눈 대화 내용이 그대로 언론에 공개됐다. 미국주재 독일 대사가 본국 외무부에 보고한 외교기밀이 언론에 흘러나간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렸다.

당시 회담이 슈뢰더 총리와 부시 대통령의 첫 상견례였던 만큼 최근의 국제 정세를 주제로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갔다. 당연히 비공개를 전제로 한 대화였기 때문에 아주 솔직한 내용이었다. 예컨대 '아라파트는 전망이 없다' (파월 국무장관)든가 '압둘라 요르단 국왕은 중동에서 가장 힘없는 지도자' (슈뢰더 총리)같은 적나라한 인물평이 그대로 공개됐다. 그래도 이런 내용이야 한번 웃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부시와 슈뢰더가 "이란이 계속 무장을 하는 것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책임이다" "러시아의 막대한 외화가 외국으로 흘러나가는 한 러시아에 대해 경제지원을 하지 않겠다" 고 한 발언은 그냥 웃어 넘길 내용이 아니다. 누가 봐도 푸틴을 불쾌하게 만들 소리다.

이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이튿날 "러시아와 독일과의 관계를 해치려는 의도적 도발행위" 라고 말했다. 그동안 아주 가깝다고 생각해 온 슈뢰더 총리가 뒤에서 '딴소리' 를 한 데 대해 배신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서운한 감정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슈뢰더 총리, 나아가 독일 정부다. 여기에서 해묵은, 그러나 아직 현재 진행형인 질문과 만난다. 이같은 내용을 보도할 경우 국익을 해치는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상황에서 과연 독자들의 알 권리를 앞세워 있는 그대로 보도해야 할까, 아니면 국익을 앞세워 보도를 자제해야 할까.

특히 벨트 암 존탁지의 27일자 보도처럼 "독일 기업의 리비아 내 사업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고의적으로 정보를 흘렸다" 면 보도를 자제하는 게 순리 아닐까.

그러나 독일 언론들은 보도를 선택했다. 보다 큰 시각에서 국익을 판단한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베를린 유재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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