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본질'을 말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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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법무장관 인사파동은 DJ 정권의 국정능력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자 대외적으로도 나라의 큰 창피가 아닐 수 없다.

특정인을 실세 검찰총장으로 만들기 위해 자격 시비를 부른 장관을 임명했다가 43시간 만에 번복한 이런 희한한 일을 두고 외국인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혹시 최단명 장관 기록으로 기네스 북에 오르지는 않을까.

*** 빙빙 도는 안동수씨 파문

그러나 이런 낯 뜨겁고 국정이 암담하게 느껴지는 사태를 맞고서도 우리는 아직도 빙빙 도는 우회적 화법(話法)이나 변죽을 울리는 소리만 되풀이 하는 감이 있다. 문제의 본질, 사태의 핵심을 정확하게 제기하고 논의해야 올바른 대응책, 정확한 처방이 나올 텐데 아직도 본질문제에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분위기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번 사태의 본질문제는 대충 세가지다.

첫째, 이번 사태는 결국 DJ 본인의 책임이라는 점이다. 누구는 청와대 보좌진을 탓하고, 누구는 비공식 실세라인을 문제삼는다. 많은 사람들이 정권의 인사시스템과 인재풀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안동수(安東洙)씨를 추천한 사람이 누구냐고 시비가 붙기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추천하고 보좌한 사람의 책임이 종(從)이라면 최종 판단하고 결정한 임명권자의 책임이 주(主)다. 그런 인물을 추천하는 안목 낮은 참모를 둔 것이나 그런 식의 인물기용을 한 것 역시 DJ 책임일 수밖에 없다.

청와대측은 의약분업 말썽이 난 후 "두번 속았다" 고 한 적이 있는데, 속이는 인물을 기용한 사람이 누구며, 속인다고 속는 대통령이어서야 되겠는가. 설사 실제 속은 일이 있더라도 밖으로 그렇게 말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한 참모는 법무장관 인선을 듣고 "예?

안동수요?" 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安씨를 추천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가 적임자가 아님을 알고 있는 참모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참모의 의견은 반영되지 못했는가.

비공식 라인 문제 역시 DJ책임이다. 왜 그런 라인을 유지.활용하고 힘을 실어주고 있는가. 항간엔 오래 전부터 인사와 관련해 불미스런 말이 떠돌고 있는데 이번 安씨 경우에도 뒤에 무슨 '사연' 이 있지 않겠느냐는 쑥덕공론이 많다.

현실적으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는데도 늘 아랫사람만 갖고 논란을 벌여서야 시정이나 개선이 될 수 없다. 우리나라엔 일종의 대통령 무류론(無謬論)같은 게 통하는데 이 역시 제왕적 대통령.권위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대통령이 잘못해도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는 풍토의 개선이야말로 대통령과 대통령제를 살리는 길이다.

이번 사태의 또 하나의 본질문제는 검찰중립 문제다. 집권측은 왜 바꿀 이유가 없다는 장관을 바꾸면서까지 특정인 검찰총장에게 힘을 실어주려 했는가. 검찰이 정말 엄정중립을 지킨다면 누가 총장이 된들 문제될 게 없을 텐데 왜 굳이 '믿을 수 있는 동향 출신' 에 집착했을까.

결국 이번 무리한 인사는 검찰중립이 아니라 '친(親)정권 검찰' 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런 점에서 검찰 중립문제는 이번 사태의 핵심 화두(話頭)가 아닐 수 없으며 당연히 치열한 논의의 초점이 돼야 한다.

과잉충성 또는 아첨 풍토라는 문제도 이번 사태에서 떠오른 심각한 본질문제다. 한때 누구는 "한마리 연어가 되겠다" 고 하더니 이번에는 "성은에 감사한다" "목숨 바쳐 충성하겠다" 는 맹세가 나왔다.

*** 아첨문화 덮어두면 안돼

여당 사무총장은 "국민이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도 했다. 대한민국이 왕조국가인가. 민주공화국인가. 권력쪽의 사고방식.문화.풍속은 다 이런 것인가.

이런 아첨풍토에서 언로(言路)가 열릴 리 없고, 아무리 유능한 참모라도 반대의견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결국 독선.독주와 인치(人治)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아첨문화를 더 이상 덮어둬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볼 때 이번 사태는 민주당 소장파가 입을 다물거나 세월이 좀 지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본질문제가 그냥 있는 한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집권측엔 시련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번 사태는 유익한 '쓴약' 이 될 수도 있다.

대통령의 판단과 책임, 검찰중립.아첨문화와 같은 정권의 본질문제에 대해 뼈저리게 알고 느끼도록 크고 강력한 경종을 울려 고칠 계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安변호사 사무실의 여직원을 탓하는 따위의 졸렬한 변명에 머물 게 아니라 쓴약을 충실히 복용해 본질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이 빨리 나와야 할 것이다.

송진혁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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