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7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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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78. 홍콩 '中企기금' 회장에

1996년 5월 29일 나는 홍콩에 있는 중기발전기금 주석(회장)에 취임했다. 창립 주주총회가 열린 이 날은 마침 나의 회갑 날이었다.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이 총회의 날짜는 대만 출신의 풍수사가 잡았다. 그는 "이 날을 넘기면 이후로 몇 달 동안 길일을 기다려야 한다" 고 말했다. 환갑날 취직하는 마당에 나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도 풍수를 따지지만 홍콩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풍수를 중시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해 보면 풍수를 이유로 책상들의 방향이 다 바뀌어 있곤 했다. 홍콩 정청은 대민관계를 고려해 건설사업예산에 풍수비용까지 따로 마련해 놓고 있었다. 풍수를 따른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책정한 일종의 과시용 예산이었다.

그에 앞서 93년 여름 아시아개발은행(ADB) 부총재 임기를 열흘 남겨 놓고 있을 때였다. 생면부지의 한 홍콩 사업가가 필리핀 마닐라로 홍콩행 일등석 비행기표 두 장을 보내왔다. 그는 스위스와 인접한 유럽의 소공자국 리히텐슈타인의 필립 왕자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필립 왕자는 유럽 왕족.귀족들의 재산관리를 맡고 있는 재단의 책임자로 그의 형은 리히텐슈타인의 통치자였다.

필립 왕자를 도와 중국에 투자를 하고 싶지만 단독으로는 진출할 엄두가 안 난 이 홍콩의 사업가가 나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홍콩으로 초청한 것이었다. 중국이라면 나도 관심이 있었다. 곧 ADB를 떠나기로 돼 있던 나는 조건 없이 이 일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1년 동안 실비로 경비를 부담하겠다면 투자자들을 모아 중국 투자 펀드를 만들어 보겠다고 말했다.

ADB 근무를 마치고 마닐라에서 일시 귀국한 나는 앞서 밝힌 대로 80년대 부실기업 정리와 관련해 검찰에 불려다녔다. 이 일로 출국정지를 당해 홍콩으로의 출국길마저 막혀 버리고 말았다. 결국 과거 몸담았던 재정경제원의 도움으로 나는 어렵사리 출국할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유럽의 주요 국가들과 미국을 돌며 중국 투자 로드쇼를 열었다. 한 번 돌고 나니 4천만달러가 모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펀드의 관리를 공교롭게도 환갑날 맡게 된 것이다.

주주총회가 끝나고 중국쪽 투자 주주들의 주선으로 성대한 리셉션이 열렸다. 그 날 저녁 아내와 함께 호텔로 돌아온 나는 베이징에 동행한 장남 준모와 셋이서 케이크와 샴페인으로 조촐한 환갑잔치(□)를 했다. 준모가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남의 나라 호텔방에서 환갑을 자축하며 쓸쓸한 생각도 들었지만 '환갑날 취직했으면 된 것 아니냐' 는 만족감도 밀려왔다. 요즘이야 환갑잔치를 차리는 사람도 드물지만.

그 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중국에서는 국가기구가 아니면 단체의 이름에 중국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중기발전기금은, 중국 공상은행의 자회사로 중국 최대의 증권회사인 화샤증권이 출자를 했지만 중국이라는 말을 못 쓰고 대신 중기(中企)를 넣어 회사이름을 지었다.

이 회사엔 국내의 대우.현대.장기신용은행.외환은행 등도 투자를 했다.

당시 필립공은 나더러 "우리 집안은 한 세기를 내다보고(century perspective) 투자한다" 고 말했다. 70년대 우리나라에 진출한 외국 은행들이 "30년 앞을 내다보고 들어온다" 고 했던 생각이 났다. 그 때 '아, 이들은 접근하는 타임 프레임부터 다르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ADB를 그만두고 민간 투자기금의 CEO로 전직함으로써 나는 명실상부하게 1백80도 방향 전환을 했다. ADB행이 공직생활의 연장이었다면 6년 만에 완전한 홀로서기를 한 셈이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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