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투표? 30조원 감시 포기하는 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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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호 35면

1년 살림살이에 30조원을 쓰는 곳이 있다. 1000만 시민이 모여 사는 서울시를 운영하기 위해 서울시청과 시교육청이 쓰는 예산이다. 모두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귀중한 돈이다. 어지간한 중소 국가의 전체 예산과 맞먹는다.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ㆍ도시철도공사 등 산하기관을 합치면 금액은 더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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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돈을 제대로 쓰는지, 낭비는 없는지 감시하는 곳도 있다. 106명의 시민 대표가 모인 서울시의회다. 시의회는 서울시 예산과 결산의 승인권을 갖고 있다. 시의회가 허락하지 않으면 서울시청과 시교육청은 한 푼도 쓸 수 없다. 그만큼 시의회는 막중한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다.

23일부터 서울시의회 임시회가 열리고 있다. 6월 4일 지방선거 이전에 열리는 마지막 회의다. 벌써 빈 자리가 굉장히 많다. 106명 중 17명이 공석이다. 그중 10명은 한나라당에 구청장 공천을 신청하면서 시의원을 관뒀다. 구청장 공천을 신청했으나 아직 사퇴하지 않은 시의원도 8명이다. 자리는 지키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는 셈이다. 이렇게 자리에서 물러났거나 물러날 준비를 하는 시의원은 25명이나 된다. 시의원 네 명 중 한 명꼴이다. 과연 정상적으로 회의를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의회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산물이다. 87년 6ㆍ29 선언에 ‘지방자치제 실시’란 약속이 포함됐다. 이후 4년이 더 지난 91년에야 지방의회가 부활한다.

2006년 7월 출범한 7대 서울시의회는 시민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줬다. ‘김귀환 스캔들’이 대표적 사건이다. 한나라당 소속이던 김귀환 시의원(당시)이 2008년 6월 의장 선거를 앞두고 동료 의원 28명에게 돈봉투를 뿌렸다. 김 의원은 의장에 당선됐으나 의사봉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돈봉투를 받은 의원들도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돼 유죄 판결(벌금형)을 받았다. 한국 지방자치 역사에서 최악의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되돌아보면 7대 서울시의회는 첫 구성부터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정원 106명 중 한나라당이 102명을 차지했다. 다른 3개 정당을 모두 합쳐도 4명에 불과했다. 복수 정당제를 하는 거의 모든 의회에는 다수당과 소수당이 있다. 다수당은 의회 운영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하지만 다수당이 이 정도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것은 본 적이 없다. 한 정당이 시의회를 사실상 독점한 것이다. 최소한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았다. 서울 외의 다른 지역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정은 비슷했다.

지방선거가 이제 70일도 채 남지 않았다. 유권자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시장ㆍ도지사ㆍ군수ㆍ구청장도 잘 뽑아야 하지만 지방의회 의원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후보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정당과 기호만 보고 ‘묻지마’ 식으로 투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지 정당도 좋지만 후보자의 됨됨이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그래야 ‘제2의 김귀환 스캔들’을 막을 수 있다. 지방의회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책임과 부담은 오롯이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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