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서정춘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

어머니는 어덕배기 구덩이에 호박씨 놓고 있고

땋머리 정순이는 떽끼칼로 떽끼칼로 나물 캐고 있고

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

나는 나는 나는

몽당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

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

- 서정춘(1941~ )의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혹독할 정도로 언어를 엄격하게 다루는 시인이다. 등단 28년 만에 1996년 첫 시집을 내고, 올 봄에 두번째 시집 『봄, 파르티잔』을 냈다.

말의 군더더기를 떼어내고, 감정의 불순물을 침전시키는 시인의 장인정신에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하고 유사한 통사 구조가 반복되고 있지만 참 맛깔스러운 시다. 그것은 시인이 곳곳에 의도적으로 전라도 방언을 배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방언의 친근성으로 말미암아 이 시는 한국인 전체의 추억을 길어올리는 한 폭의 따뜻한 그림이 된다.

안도현(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