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이유 있는 EU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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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화가 출범한 1999년 1월 1일. 유럽은 희망에 부풀었다. 달러에 버금가는 통화를 가졌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랬던 유로화가 속절없이 하락하고 있다. 25일 한때 유로화 가치는 1.32달러대로 떨어졌다. 1.33달러 선이 깨진 것은 10개월 만이다.

유로 약세는 그리스 재정난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가 아니라 한 달이 넘도록 해법을 내놓지 못한 유로존(유로를 쓰는 16개국)이다. 위기에 대한 처방은 내용 이상으로 속도가 중요하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그리스 문제를 넘기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시장은 IMF 지원을 ‘유럽의 무능’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무능력은 태생적 한계에서 나온다. 금리를 조정하는 중앙은행(ECB)은 있는데, 경제정책을 총괄할 유럽 재무부는 없다. 통화는 하나인데, 정치는 제각각이다. 경제통합은 이뤘는데 정치통합은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엔 티가 나지 않는다. 대신 속으로 곪는다. 일부는 자기 실력보다 높은 통화가치로 호사를 누렸고, 일부는 다른 나라 돈으로 농업 보조금을 퍼줬다. 위기에 몰린 그리스는 유로의 약점을 활용했다. 16척의 배(국가)가 한데 묶여 있어, 불이 나면 다 죽는다는 공포를 이용해 배짱을 튕겼다.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이자 무임승차다.

위기 앞에서 리더들은 갈라졌다. 독일은 “우리처럼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다그쳤고, 프랑스는 “독일 수출은 다른 유럽 국가의 희생(무역적자)의 결과”라고 맞섰다.

정치적 계산도 끼어들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독일 국민의 67%는 그리스 지원에 반대한다.

다투는 사이 문제는 더 꼬였다. 신용평가사인 피치는 24일 포르투갈의 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낮췄다. 피치가 포르투갈의 등급을 낮춘 것은 98년 이후 처음이다. 이로써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 위기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유로존은 25~26일 다시 마주 앉는다. 유럽 정상회의에서다.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스위스 UBS의 폴 도너번 부대표는 “유로존이 출범 후 처음 맞은 위기를 다루는 데 실패하면, 그리스는 결국 디폴트(국가 부도)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증시 반응은 엇갈렸다. 24일 미국 뉴욕 증시는 소폭(-0.48%) 하락했고, 25일 한국(0.44%)·일본(0.13%) 증시는 소폭 올랐다. 이미 그리스 문제가 어느 정도 시장에 반영됐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럽이 해법을 내놓지 못해 유로 가치가 더 떨어지면 문제가 커진다. 반사작용으로 달러 가치가 오르면 달러를 빌려 세계 각국에 투자한 돈들이 역류하면서 시장이 다시 요동칠 수 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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