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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토 대결 아직 안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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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날로 쇠락해가던 한반도에서 이토 같은 인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대신 안중근이 태어났다. 1879년이었다. 그는 갓 서른 살이던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68세의 거물 정객 이토를 쏘아 거꾸러뜨렸다. 그리고 꼭 100년 전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당해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 후 100년, 즉 1세기가 지났다. 추모 열기는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나는 이제부터는 안 의사에 대한 의례적인 추모를 넘어서 그를 객관화·보편화·세계화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리 마음속에 박제(剝製) 상태로 남아 있던 안 의사를 살려내고, 혈관을 뚫어 드리고,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얼빈 의거가 한민족만의 거사가 아닌 세계사적 저항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게 만들어야 한다. 순국 후 1세기나 지난 시점에서 ‘의사’가 옳으니 ‘장군’이 옳으니 하는 유치한 수준이어선 안 된다. 그의 정체성을 굳이 ‘장군’으로 한정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군인끼리야 그렇게 불러도 좋겠지만, 일개 장군 지위에 머무르게 해 ‘동양평화론’이 보여준 혁명가·사회개혁가·철학자적 면모를 가리는 것은 오히려 고인을 욕되게 할 수도 있다.

원로 출판인 이기웅(열화당 대표)씨는 필생의 작업인 파주 출판도시 조성 일을 하면서 안중근을 ‘마음의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1970년대에 이은상이 엮은 ‘안중근 공판기록’을 처음 만났다. 그러나 20여 년간 잊고 있다가 출판도시 작업이 곳곳에서 난관에 부닥치자 다시 책을 꺼내 들었다. 관료들의 비협조와 “땅 장사 한다”는 등 주변으로부터 온갖 오해를 받던 때였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만난 안중근은 그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1909년에 거사를 치르고 일본인이 꾸민 법정에 선 안 의사의 어려움은 어땠을까. “그에 비하면 나는 나라가 있고 먹을 것, 입을 것도 있는 행복한 처지 아닌가. 나의 고난은 그야말로 장난 수준이다. 나도 목숨 걸고 일해보자”고 다짐했다고 이기웅씨는 회고했다. 출판도시 사업은 서서히 궤도에 올랐고, 이씨는 안 의사 공판기록도 새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999년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라는 책이 나왔다. 이씨는 출판도시 내 6개 다리 중 가장 큰 다리에 안 의사의 아명(兒名)을 붙여 ‘응칠교’라고 명명했다. 오늘 오전 10시 응칠교에서는 안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다리밟기 행사가 열린다.

안 의사의 업적과 사상이 몇몇 개인에게만 영향을 끼칠 정도로 품이 좁을까. 아니다. 특히 평화에 대한 처절한 갈망은 우리가 하기에 따라 일본·중국을 넘어 전 세계에 통할 수 있다. 한·일 학계에서도 그의 동양평화론을 독일 철학자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비교한 연구 성과들이 나오고 있다. 반면 일본 학자 중에는 “이토가 저격당하지 않았다면 한국 병합은 늦춰졌거나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많다. 결국은 콘텐트다. 불과 30세에 순국한 안 의사를 우리가 더 ‘키워야’ 한다. 1년 한 번 추모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안중근과 이토의 대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