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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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기록으로서의 역사에는 여백 혹은 행간이 있다. 그 여백을 읽어내는 감수성은 독자 개인들의 몫이다. 역사를 보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 여백을 메우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눈물은 거대한 역사의 물결 속에 잊혀지기 쉽다.

신간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는 그 가슴저린 우리 현대사의 여백을 손톱으로 긁어내듯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제시대 항일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거쳐 6.25 전쟁 도중에 월북했다 간첩으로 남하하여 체포된 후 22년간 장기수로 복역, 60세가 되던 1980년 병든 몸으로 풀려나 21년째 남한에서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체험하고 사는 노촌(老村) 이구영(81)씨의 일대기다.

신간은 98년 『산정(山頂)에 배를 매고』(개마서원)란 이름으로 출간되었으나 곧 절판되자 이를 아쉬워한 제자들이 남북한 사이에 숨통이 조금 트인 현실을 반영한 제목으로 문패를 바꿔 다시 펴낸 것이다.

그 제자들이란 노촌의 대전교도소 시절 감방동료인 신영복(성공회대 경제학).심지연(경남대 정치외교학)교수다. 심교수가 노촌의 구술을 받아 집필한 것은 첫 판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으나, 이번 판본에선 신영복 교수가 노촌과의 권두 대담을 새로 실어 노촌의 삶과 생각을 정리했다.

노촌의 일생을 좌우하고 있는 두 개의 정서는 전통 유학과 항일(抗日)이다.

충청도에서 유명한 부잣집 양반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독선생을 여럿 두고 한학교육을 받았으나 선친과 숙부의 열렬한 의병활동을 이어 항일투쟁을 전개한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혼합된 일제때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독서회 활동으로 투옥된다. 이때 그를 체포한 한국인 경찰이 후에 남파된 그를 다시 체포하는 과정은 해방정국의 굴절된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이기도 하다.

노촌은 80년 출옥 후 만든 '이문학회(以文學會.02-766-8269)' 에서 지금까지 뜻을 같이하는 제자들과 동양고전을 함께 읽고 강의하고 있다. 93년엔 감방시절부터 번역해온 의병투쟁기인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수서원)을 펴내기도 했다.

노촌은 그야말로 숨가빴던 격랑의 우리 현대사를 가장 힘든 곳에서 온몸으로 살아온 몇 안되는 생존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유명한 명망가가 아니다. 그의 고향지명을 딴 아호처럼 그저 푸근하고 평범한 촌로(村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망국의 부당함과 인간의 불평등에 대한 젊은 날의 당연한 분노가 그와 가족의 일생을 평생 돌이킬 수 없는 개인적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평생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했다는 그이기에 아쉬움은 없다지만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그의 아호에서나마 내비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촌은 현재 병환 중에 있는 부인과 그리 넉넉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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