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를 다지자] 96. 시각장애인 배려 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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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몇년 전 미국에서 살 때 시각장애인들이 뉴욕 맨해튼의 횡단보도에서 개의 안내를 받아 큰 불편없이 길을 건너거나 버스.택시를 타는 광경을 흔히 보았다.

개가 식당에서 주인인 시각장애인 곁에 얌전히 앉아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떤 손님도 덩치가 큰 그 개를 특별히 경계하지 않았다.

시각장애인 안내견은 대개 선원들이 키웠다는 북미산 '래브라도 리트리버' 였다.

이 개는 선원들이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지면 즉시 물에 뛰어들어 그 곁에서 마구 짖는다. 주의를 끌어 빨리 구조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귀국 후 삼성에버랜드가 리트리버를 열심히 훈련시켜 시각장애인들에게 무상 분양한다는 소식에 기쁘고 반가웠다.

갓 태어난 강아지 한 마리를 시각장애인의 평생 반려자로 만들려면 마리당 1억원이 넘는 돈과 조련사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하철 외에 대부분의 공공장소에서 안내견의 출입을 금지 또는 제한하고 있다.

안내견의 도움을 받는 시각장애인은 오히려 버스.택시도 맘대로 못타고 식당에 가기도 힘들다. 그래서 안내견을 자진 반납하는 사례도 있다.

안내견은 교통신호등을 볼 줄 알고 대중교통을 잘 이용하며 용변도 가릴 줄 안다. 성품도 조용하고 온순하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정숙이 요구되는 극장에도 안내견의 출입이 허용된다.

두세 시간은 거뜬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주인 곁에 꼼짝 않고 앉아있기도 하고 사람들이 먼저 괴롭히지 않는 한 놀라게 하지 않는다.

눈을 한번 감고 딱 열 발자국만 걸어 보자.

그러면 앞을 못보는 사람들에게 안내견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다. 눈을 감고 걸어도, 앞이 보이지 않아도 편안하게 살 수 있어야 진정 기초가 튼튼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태하 <에델만월드와이드코리아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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