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신채호선생과 뤼순감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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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안중근의사가 중국 旅順감옥에서 순직한지 100년이 되는 해로 많은 한국인들이 뤼순을 찾아 가 안의사의 감방이며 그가 처형된 장소를 둘러 본다. 그리고 뤼순 감옥을 나오면 산등성이에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보고 안의사의 무덤도 그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아직도 찾지 못해 아쉬워 한다. 또한 뤼순감옥을 둘러 보다가 한말 계몽 독립운동가이며 역사가 언론인인 丹齋 申采浩(1880-1936)선생도 뤼순감옥에서 옥사한 것을 알게 된다.

신채호 선생은 중국 특히 北京과도 관계가 깊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1918년부터 北京의 普陀庵에서 기거하면서 1919년 1월에는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수립에도 잠시 참여하였으나 이승만을 지지하는 임정요인에 대한 반발로 사임하였다. 그는 조선 上古史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淸대의 四庫全書를 참고할 수 있는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와 石燈庵에 머물렀다.

그는 자료수집과 열람을 위해 北京의 5.4로에 있는 붉은 벽돌건물(紅樓)의 北京대 도서관에 자주 출입하였다. 그는 당시 도서관장이었던 리다자오(李大교)와도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된다. 리다자오는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천두슈(陳獨秀)와 함께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을 창당한 인물이다.

리다자오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을 때 일본유학 선배 천두슈는 당시 蔡元培 北京대 총장에 의해 문과학장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리다자오는 천두슈의 추천으로 경제학과 교수겸 도서관장으로 발탁되었다.

호남 제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은사 楊昌濟를 찾아 상경한 젊은시절의 毛澤東이 李관장의 배려로 도서관 사서로 근무한 때가 이 지음이었다. 1920년 1월 은사 楊교수의 뜻밖의 요절로 毛청년은 사서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사의 딸 楊開慧와 결혼하고 본격적인 공산주의 활동을 한다. 리다자오의 마르크스사상은 후에 毛澤東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李교수는 후에 공산당 사상과 관련 반공주의자 張作霖 군벌에 의해 北京에서 체포되어 1927년 형장의 이슬이 된다.

신채호 선생도 리다자오의 교류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한 무정부주의적 사상을 서로 주고 받았던 것 같다. 리다자오의 사후에도 신채호 선생의 무정부주의적 활동은 계속되어 1928.4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베이징회의“를 조직하고 1929년에는 베이징에서 위조한 지폐를 대만의 무정부주의자에게 비밀히 전달하는 과정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신채호선생은 大連으로 이송되어 10년의 형을 선고 받고 뤼순감옥에서 형을 살다가 1936년 뇌일혈로 숨을 거둔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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