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3) 다부동의 마지막 위기를 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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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의 망중한(忙中閑). 6·25전쟁에서 함께 작전을 수행해 북한군의 공세를 막았던 한국군과 유엔군 장병의 팔씨름판이 벌어졌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국군과 유엔군의 두 팔씨름 대표를 지켜보고 있는 국군들의 표정이 다채롭다. 촬영 장소와 시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중앙포토]

나는 고백하건대, 총을 잘 다루지 못한다. 사격을 해도 늘 평균 이하의 수준이다. 총을 잘 다루지 못하는 지휘관.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어쨌든 그런 군인이다. 그리고 남과 잘 다툴 줄을 모른다. 싸움을 말리는 편이지, 남과 얼굴을 붉히면서 대거리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게는 버티는 기술이 있다. 말하자면, 뚝심 비슷한 것이다. 남의 말을 경청하면서 끝까지 들어주는 인내력은 내가 갖춘 유일한 장점이다. 그 인내력의 끝. ‘이제 도저히 물러설 수 없다’는 결심이 생기면 끝까지 버틴다. 내가 군 생활을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힘이다. 그 힘이 위기의 순간에서 발휘된 것일까.

부하들은 기적적인 승리를 만들어냈다. 나를 주저앉히던 억세고 강한 손길의 부하들은 마침내 고지를 탈환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한 부하들은 산을 넘어오던 적들을 모두 그 너머로 쫓아냈다. 부하들은 끝내 나와 함께 버티면서 기적과 같은 승리를 일군 것이다.

적은 고지에서 쫓겨 내려간 우리 부대원들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새 증원 병력이 도착한 것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큰 함성을 외치면서 달려드는 우리 부대원들의 기세(氣勢)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전투 교범에 맞춰 생각해 보면 사단장이 돌격 일선에 선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사단장은 전략(戰略)의 단위에 있는 사람이다. 전략의 밑을 이루는 전술(戰術)은 연대에서 이뤄진다. 대대도 그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래서 참모가 있는 곳이 대대 이상 급의 부대다. 대대 밑의 중대와 소대는 전투(戰鬪)를 수행한다. 전략 단위인 사단에서는 전장(戰場)을 더 넓은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물자와 화력(火力)의 동원, 병력의 이동 및 배치를 큰 차원에서 다루는 곳이 사단이다.

그 사단장이 총을 뽑아 들고 돌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이상한 선택이다. 그러나 전쟁은 교범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상황이 절박하거나, 최후의 고비에 다다르면 반드시 교범대로 싸움이 진행되지 않는다. 내가 잘 다루지도 못하는 권총을 꺼내 들고 부대원들의 앞에 서서 돌격을 감행한 것은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기 때문이다.

전략을 다루는 존재가 사단장이기는 하지만, 현장에서 이뤄지는 세부적인 전투를 모두 통합해서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늘 현장이 중요하다. 사단장은 현장에 붙어서 그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만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다급한 상황에서 절박하게 나선 나를 믿고 따라준 부하들의 힘이 전선을 지켰다. 너무 위태로운 상황은 전략과 전술, 전투의 경계를 넘어서게 한다. 그 상황에서는 어느 지휘관이든 나와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좋았다.

625 전쟁 중의 연합작전은 문화의 교류를 가져 오기도 했다. 지게로 군사 물자를 옮기는 미군의 모습이 이채롭다. [중앙포토]

미군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 27연대의 마이켈리스 대령은 내가 산에서 내려오자 바로 나를 찾아 왔다. 그는 다부동 아래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왔다. 그는 우선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사단장이 직접 전투 지휘를 하는 것을 보니 한국군은 대단하다”면서 치켜세우기도 했다.

마이켈리스 연대장은 그 사건 이후로 나와 정말 친해졌다. 십년지기(十年知己)처럼 변했다. 따져보면 ‘신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군대가 같은 적을 상대로 함께 싸우는 것을 가리켜 ‘연합작전’이라고 한다. 내가 지키는 곳을 쉽게 적에게 내준다면 연합작전은 펼쳐지지 않는다.

서로 약속한 방어지역을 죽음으로 사수(死守)하는 자세를 보여야 그 작전은 성공한다. 서로 맡은 지역을 쉽게 놓친다면 그것은 나의 파멸이기도 하지만, 어깨를 함께한 연합작전에서 이는 파트너에게 더 큰 위협으로 닥친다.

천평동 계곡 좌측방을 내줬다면 마이켈리스의 27연대는 자칫 몰살당하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었다. 그곳을 뚫고 온 적이 우회해서 미 27연대의 후방을 막아 포위한다면 마이켈리스의 연대는 계곡 속에 갇히는 꼴이 된다. 탱크와 야포를 비롯한 중화기(重火器)와 여타 장비가 엄청났던 미군 연대 병력은 기동성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만일 포위를 당했다면 참담한 결과를 빚을 수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계곡 아래 간선로를 미군이 적에게 내준다면 국군은 산에서 고립되는 형국이다. 화력 지원 없이 산속에 갇힌 국군은 퇴로도 막혀 참담한 패배를 기록했을 것이다. 내가 맡은 작전을 죽음을 무릅쓰고 수행한다는 그런 믿음, 그것이 연합작전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인이다.

그렇게 친해진 마이켈리스를 한 달 뒤 청주에서 다시 만났다. 반격에 성공한 국군과 미군이 북진을 거듭할 때였다. 국군 1사단은 청주, 미 27연대는 속리산 보은 쪽에 있었다. 그가 나를 찾아 왔다. 청주의 충북도청에서 나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막걸리와 김치에, 그들이 가져 온 B레이션(소시지와 고기 통조림 등이 들어있다)을 놓고 참모진이 함께 어울렸다.

“백 사단장, 1사단은 어디로 갑니까?” 그가 물었다. “평양을 공격한다”고 내가 대답했다. 그는 ‘참 좋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군인은 앞장서서 적을 공격하는 게 좋지 않으냐”며 “우리 부대는 이번엔 뒷수습을 맡았다”고 대답하면서 혀를 찼다. 그런 그의 군인정신이 좋아 보였다. 미군은 그런 지휘관들이 이끄는 우직하면서도 강한 군대였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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