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고 이용희 전 창년 대지초등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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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9일 부산시 주례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지낸 이용희(李容熙)전 경남 창녕군 대지초등교장을 모신 장의차는 두시간 전에 떠나왔던 부산대 병원으로 되돌아갔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의대생들에게 교육용으로 기증하기 위해서였다.

경남도내 시골 초등학교에서 교사.교장으로 40여년간 봉직한 고인은 지난 5일 75세로 타계하면서 "교육자로서 해놓은 게 없으니 사후 내 몸을 의대에 바치겠다" 는 뜻을 남겼다.

고인은 생전에 어린이를 끔찍히 사랑했다. 최근 수년간 2월말이면 취학을 앞둔 이웃 어린이 10여명에게 꼬박꼬박 책가방을 선물했다. 길을 가다가도 어린이만 보면 불러서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1926년 6월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13세 때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5년제 공고 전기과를 졸업하고 43년 귀국해 부산의 한 전기회사에 취직했으나 45년에 사직했다. 그리고 그 해 경남 창녕 유어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됐다.

그러나 그의 올곧은 성격 때문에 교사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61년 창녕 성사초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 교원단체 간부로 교사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다 마산교도소에 6개월간 수감됐다. 출소 후엔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3년간 교단에 서지 못했다.

그는 동료 교사들에게 볼펜을 팔아 생계를 잇다가 부산으로 가 충무동에 중국음식점을 열었지만 경찰이 불온인물이라는 이유로 밀가루 공급마저 막는 바람에 2년여 만에 식당 문을 닫아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64년초 다시 교단에 서게 됐다. 교원 인력난이 심하자 정부가 복직을 허용한 것이었다.

장녀 옥주(玉珠)씨는 "새로 교원임용 시험을 쳐서 합격한 뒤 고향 근처인 창녕군 장마초등학교로 다시 출근하게 되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다" 고 회고했다.

30여년간의 평교사 생활을 거쳐 78년 창녕군 청암초등학교 교장이 된 고인은 91년 대지초등교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이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 지난해 말 간암 진단을 받은 뒤 시신 기증서를 작성했다. 부인 신재두(申在斗.73)씨의 반대가 거셌으나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빌어 결국 허락을 받았다.

그는 부고장을 손수 만들어 친지 2백명의 명단과 함께 건네주면서 장례가 끝난 뒤 보내라고 했다. 비석에 새길 글도 소박하게 직접 지었다. 앞면에 '光州 李公 容熙之墓' 라고만 쓰고 '교장' 이라는 명칭은 빼라고 강조했다.

투병으로 의식이 혼미하던 지난 3월초에는 TV로 초등학교 입학식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 고인은 어린이날 천진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차남 상재(尙載.47.이상약품 대표)씨는 "시신 기증서를 작성한 뒤 어린이처럼 기뻐하셨다" 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실습이 끝나면 유골을 인계받아 안장하고 고인이 생전에 지시한 대로 묘비를 만들어 세울 계획이다.

창녕=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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