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탈아’에서 ‘입아’로 … 한국 열공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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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사진 = 블룸버그

요즘 일본에선 한국 배우기 열풍이 한창이다. 밴쿠버 겨울올림픽 이후 더욱 그렇다. 김연아가 아사다 마오를 이긴 배경에 한·일 간 스탭진과 전략의 차이를 빗대기도 한다. 일본 경제의 현주소는 어디인지,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한·일 양국 간에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일본 게이단렌(經團聯) 산하 경제홍보센터 도움으로 지난주 일본 현지에서 만난 일본 기업인·정치인·관료·학자들로부터 들어봤다.

◆일본 경제는 지금=17일 오후 일본 도쿄 시내 재무성. 나카오 다케히코(中尾武彦) 국제국장 책상 정면 벽에서는 환율·닛케이평균주가·미국다우지수·미국채10년물 등 주요 경제지표가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말은 일본 경기의 요즘을 대변했다.

“1978년 대장성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한 번에 8000엔(현재 환율로 약 10만원)가량 쓰는 건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5000엔(약 6만3000원)도 비싸다는 생각이에요. 저 역시 국장이 돼 월급이 올랐지만 외식하거나 옷 사는 데 부담을 느낍니다. 중산층이 두터운 자랑스러운 사회였는데 지금은….”

같은 날 도쿄 히타치 본사. 올해로 창업 100주년이 되는 종합전기회사다. 연간 매출이 10조 엔(약 125조원)이 넘는 일본 대표기업 중 하나다. 핫초지 다카시(八丁地隆) 대표이사 부사장은 “우리는 지금 대규모 개혁 중”이라고 말했다. 에너지·환경 특화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무려 700억 엔의 적자를 기록하는 바람에 다시 한번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재도약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소비재 업체도 마찬가지. 아사히맥주 오기타 히토시(荻田伍) 사장은 “인구가 줄고 경쟁사가 느는 등 주변 환경이 매우 어렵다”고 토로했다.

미쓰비시UFJ·미즈호은행과 함께 일본 3대 초대형 은행 가운데 하나인 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오쿠 마사유키(奧 正之) 은행장은 “일본 경제는 11개월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전망에 그는 “일진일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올해 후반이나 내년에 나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즈호종합연구소 나카지마 아쓰시(中島 厚志)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일단 바닥은 쳤다”고 진단했다. 그는 그러나 “공장가동률이 낮고, 고용과 임금도 줄어 소비력이 대폭 낮아졌다”며 소비력 급감 문제를 거론했다. 한국과 비슷한 상황도 거론했다. “지방에 문닫은 가게가 많아요. 그런데도 동네 상인들은 마트나 쇼핑센터 진출을 못하게 합니다. 문닫은 상점에는 상가 주인이 살지요. 가장 입지조건 좋은 곳을 거주지로 삼고 있는 셈입니다. 이 상태로는 소매업에 활력이 없습니다.”

◆한국 배우기 열풍=일한경제협회 이지마 히데타네(飯島 英胤) 회장은 한국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①다른 나라에 없는 고급 인재들이 있다 ②사회가 안정돼 있다. 한국에 직원들을 파견하면 처음엔 “예?”라며 다들 싫어했는데 4년 뒤 “돌아오라”고 지시하면 돌아오기 싫어 하더라 ③이명박 대통령의 경제외교가 한국 기업에 큰 힘을 주고 있다 ④환율정책이 뛰어나다. 일본은 과거엔 잘 했지만 지금은 잘 못한다.

한국 문제에 정통한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 政夫) 게이오대 교수는 “우리에겐 없는 게 한국에 있다. 한국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는데, 일본은 일본 스탠더드에 맞춘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대결만 봐도 그렇다. 일본은 기술에 집착한다. 너무 일본적이다. 한국 요소를 반영하면 좋겠다. 그 예가 삼성이다”고 말했다.

정치인들도 한몫 거든다. 자민당 중의원 의원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간사장대리는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주전을 예로 들며 “우리는 프랑스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이었다”고 놀라워했다. 특히 삼성·LG가 일본 기업보다 우위에 있다고 덧붙였다. 그 이유에 대해 한국에선 한 업종에 한두 개 기업이 강세인데 반해 일본에선 너무 많은 주요 기업들이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커지는 아시아 비중=일본 최고액권인 1만 엔권에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 諭吉)의 초상이 들어 있다. 게이오대를 세운 일본 근대화의 선각자다. 그가 내건 기치는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넘어 서구화하자는 주장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사뭇 다르다. 재무성 나카오 국장은 “과거엔 G7(선진 7개국)의 경제지표 자료를 중시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과 중국을 주시한다. 매달 한국에 관한 자료를 업데이트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아시아 전체를 내수로 본다”고 덧붙였다. 혼다의 이케 후미히코(池史彦) 아태본부장은 “과거엔 북미 비중이 컸으나 지금은 중국 비중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국회 논객으로 유명한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국가전략담당 장관은 자원·환경·에너지 분야에서 한·중·일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일본이 성숙기에서 침몰의 길로 갈 가능성이 있다면서 ‘제3의 개국’으로 가야 하며 아시아 안에서 아시아 사람들과 상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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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정선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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