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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와이드] 외국인전용 게스트 하우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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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해 서울을 찾은 외국인은 4백25만6천여명. 이중 60만명은 배낭 여행객이다. 하지만 서울에는 외국인 배낭 여행객을 위한 숙소가 많지 않다.

세계 배낭족들의 바이블인 '론리 플래닛' 서울편(1999년 개정)에는 '♨ 표시를 찾아가라' 고 적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서울에도 몇 안되지만 전통적인 여관이나 현대식 콘도 형태의 배낭객 숙소인 '게스트 하우스' 가 있다.

*** 情으로 승부한다(대원여관)

지난 7일 보슬비가 내리던 아침 서울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에 있는 대원여관은 유난히 북적거렸다.

비오는 날은 여행자에게는 공치는 날. 7호실 크리스티(21.미국)는 미닫이문을 활짝 열고 방바닥에 철퍼덕 앉아 담요를 터느라 여념이 없다. 마당의 테이블에는 방금 이곳에 도착한 일본인 세명이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다.

대문 옆 골방에서는 파키스탄인 소야와(37)가 이슬람 음악을 틀어놓고 경전을 읽고 있다. 무역업을 하는 소야와는 지난 5년 동안 서울에 올 때마다 이 골방에 묵고 있다. 주인 아저씨와 호형호제하며 한국말도 곧잘 한다.

웃통을 벗은 채 샤워실로 달려가던 크리스토퍼(23.미국)가 소야와에게 이슬람식 절을 하며 장난을 친다. 부산.공주를 거쳐 서울에 왔다는 고바야시(35.일본)는 공연 '난타' 의 한국어 팸플릿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끙끙댄다.

"옛날에는 외국 사람은 노린내 난다고 여관에서 통 안받았지. 나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어. "

주인 김용길(63)씨의 철학대로 대원여관은 30년 동안 외국인만 받고 있다. 인터넷과 여행 가이드북이 없던 그 시절에도 입소문이 퍼져 항상 외국인들로 북적였다. 왔던 사람이 다시 오고 그 사람의 친구들이 물어물어 들른다.

파격적인 방값도 외국인을 끄는 유인책이다. 4인실은 1만원, 독방은 1만5천원으로 서울지역 여관비 3만원의 절반도 안된다. 설날.추석 등 주변 식당이 문을 닫는 명절 때면 손수 떡국이나 밥을 지어 외국인들을 대접하고 빨래거리를 내놓으면 군말없이 세탁해 준다.

김씨는 이곳에서 자식들을 키워냈고 일본으로 모두 유학시켰다. 수십년 외국인을 대하다 보니 영어.일어.스페인어가 유창한 수준이다.

"세계 경기가 안 좋아졌는지 지난해부터 손님이 줄었어. " 안목도 세계적이다.

대원여관은 허름하고 낡았다. 재개발 금지구역으로 묶여 손쓸 수가 없지만 마당에 타일도 깔고 방에 이층 침대도 들여놓는 등 나름대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마침 10년 만에 옛 기억을 더듬어 이곳을 찾은 스튜어트 소머는 "너무 깨끗해졌다" 며 감탄을 연발했다. 김씨는 소머를 기억했다. "비쩍 마른 학생이 이렇게 뚱뚱해지다니…. " 가난한 배낭여행객 소머는 현재 홍콩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오후가 되자 비가 그쳤다. 김씨는 마당에 있는 화분의 나뭇잎을 정성스레 닦았다. 비갠 뒤여서인지 분무기로 물을 뿌릴 때마다 작은 무지개가 생겼다. 심심풀이로 한국어를 배웠다는 고바야시가 '난타' 를 보러 간다며 여관을 나가다가 무지개를 보고 큰소리를 쳤다. "아저씨, 지우개 떴네요! 지우개 떴어!"

*** 즐거운 떡볶이 투어 (게스트하우스 코리아)

세 친구가 있다. 해외 나들이를 자주 하다가 서울에도 외국인 전용 숙소가 있어야 한다며 의기투합했다.

'게스트하우스 코리아' 는 이렇게 해서 지난해 11월 종로구 와룡동 2층 가정집에 문을 열었다. 인터넷 광고를 보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하나둘 이 집을 찾아왔다.

침대방 다섯개에 수용 인원은 25명. 잠만 자는 숙소만을 제공하기에는 뭔가 성이 안찼다. 외국인이 한국을 제대로 알고 갈 수 있도록 돕자는 생각에서 '세 친구와 떠나는 서울여행' 을 착안했다.

신당동 떡볶이집부터 노점상 떡볶이까지 두루 돌아보는 '떡볶이 투어' , 시장에서 김치 재료를 사다가 함께 버무려 보는 '김치 만들기' , 관광 사우나가 아닌 동네 목욕탕에 가서 서로 때밀어 주는 '목욕 투어' 등 기발한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겼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보낸 웨스턴(미국)은 "가정집 같은 분위기에 방값이 싸고 또래 친구들이 있어 즐겁다. 한국에 다시 와도 여기로 오겠다" 며 원더풀을 연발한다.

'게코' 는 외국인들을 지방에 사는 한국인과 연결해 주는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외국인 손님이 어느 지방에 가고 싶다고 하면 그곳 현지인이 무료 가이드를 해주는 방식이다.

*** 한국의 멋을 찾아(트렉 코리아)

치과의사 이승건씨가 97년 문을 연 '트렉 코리아' 는 외국인만의 숙소이면서 동시에 오지 마을을 돌아보는 일정을 제공하고 있다.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숙소는 서양식 별장에 온 것 같아 유럽인에게 인기다. 넓은 거실에는 푹신한 소파와 세계 각국의 위성방송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웬만해선 경험할 수 없는 한국의 오지 마을 여행도 외국인들에게 매력있는 프로그램이다.

이승건씨가 탐사 대장으로 주말마다 떠나는 오지 여행에는 국내 여행 매니어들도 참가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를 익힐 수 있다.

여행 비용은 1박2일 일정에 5만~7만원 수준이다.

이들은 두메산골 덕풍마을이나 외나로도.소록도 등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을 찾아 다닌다.

상경길에는 첼리스트 된장마을, 순창 고추장마을 등을 들러 한국의 전통 음식 조리법을 살펴보기도 한다.

얼마전 경남 함양의 산골에 있는 견불동을 답사한 찰리 팩(미국)은 "산비탈을 깎아 밭을 만들고 돼지를 키우며 사는 전통적인 한국인을 볼 수 있어 아주 색달랐다" 며 "한국 하면 콘크리트 건물만 떠올랐는데 이런 곳을 둘러볼 수 있어 좋았다" 고 흐뭇해했다.

이승건씨는 "한국에선 '게스트 하우스' 가 아직 생소하다" 며 "외국인들에게 무조건 한국에 오라고만 하기에 앞서 다양한 숙소와 알찬 여행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한다" 고 말했다.

글=박지영 기자

사진=신인섭, 그래픽=김영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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