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수·김재건·이문수씨 8년째 한 무대 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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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인 '피고지고 피고지고' (이만희 작.강영걸 연출)에 출연 중인 국립극단 단원 이문수(52).김재건(54).오영수(57)씨.

이들은 벼락횡재의 꿈을 버리지 못해 3년 동안 도굴에 매달리고 있는 늙은이 '왕오(69)' '천축(68)' '국전(67)' 을 연기한다. 이 작품이 초연된 1993년부터 셋이 함께 출연했으니 벌써 8년째. 초연 당시 40대였던 세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신사로 변했다.

"8년 전 초연 때 이런 깊이있는 대사들을 내가 어떻게 연기했을까, 생각만 해도 낯이 뜨거워진다" 고 맏형뻘인 오씨가 말문을 열자 "맞아. 한 사람당 대사가 5백20개가 넘어 대사 외우기에 바빴지, 연기에 신경이나 쓸 수 있었겠어" 라며 김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대사가 많기로 소문난 작가 이만희의 작품(공연시간 2시간35분)임을 감안하면 납득할 만하다.

10년 가까이 해온 노릇이니 이젠 그런 걱정 안해도 되겠다고 묻자 막내 이씨가 손을 내젓는다. "처음엔 매너리즘에 빠질까봐 걱정했는데, 대본을 볼 때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나와 연기하기가 더 어렵다" 는 얘기다.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극중에서는 가장 나이많은 '왕오' 를 맡은 그는 "선배들(천축.국전)은 모두 말만 많았지, 술자리 가면 이도령 모시는 방자처럼 심부름해야지, 자질구레한 물건들 챙겨야지…무대 밑의 땅굴도 왕오 혼자 판다" 며 너스레를 떨었다.

극중 가장 돋보이는 역할은 힘세고 다혈질인 왕오와 촐싹대고 변덕 심한 국전 사이에서 바른말만 골라하는 천축.

"대저 인생이란 공수래 공수거가 아니더냐. 백일홍이 피었다 진다 한들 어찌 세월을 탓할소며, 이 몸 죽어 무소귀면 산천 또한 더불어 황천행이 아니더냐…" 천축의 대사는 곧 작가의 메시지이자 세상의 이치다. "모두 탐내는 역이라 역할 지키기가 쉽지 않다" 는 김씨에게 오씨가 "그래도 다음번엔 나한테 한번 넘겨라" 고 투정을 부린다.

이 작품은 볼품없이 늙어버린 세 노인이 신라시대 보물을 캐기 위해 인생의 마지막 정열을 바친다는 내용. 보물을 찾는 동안 이들이 쉼없이 토해내는 골계미 넘치는 대사가 일품이다. 오씨는 "노인들 이야기라고 중장년층만 오면 어쩌나 처음엔 걱정도 많이 했지만 작품 좋다는 소문 덕에 20~30대 관객이 대부분" 이라고 소개하자 김씨가 말을 가로막는다.

"왜 그래. 93년 대구공연 때 기억 안나? 여학생 50명이 '젊은 오빠' 들 사인받겠다고 분장실에 몰려와 난리친 거. " 옆에서 이씨도 거든다. "그럼 내친 김에 10년 후에도 나란히 이 작품에 출연해 '원로 세 친구' 라도 만들어 볼까요?

그 때가 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연기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성숙했으면 좋겠는데. " 끝없는 배움의 자세를 보이는 세 인물도 그렇지만, 신라 보물이 묻힌 고분을 향해 3년이나 굴을 파간다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일상의 얘기처럼 만든 강영걸의 연출, 자연스럽고 편안한 최연호의 무대장치도 관객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큰 요인이다. 27일까지.

오후 7시30분, 토 오후 6시, 일 오후 4시. 02-2274-3507~8.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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