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루스벨트·존슨과 견줄 만한 인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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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동안의 좌절을 딛고 오늘 밤 우리는 역사의 부름에 답했습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1일 밤(현지시간)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조 바이든 부통령을 옆에 세워 놓고 상기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건강보험 개혁법안 통과의 의미를 스스로 밝힌 것이다. 오바마는 늘 역사를 의식했다. 대선 전후 그가 읽는 애독서 목록에는 에이브러햄 링컨과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리더십 연구서가 들어 있었다. “편협한 분열의 정치를 초월해 미국을 통합하겠다”는 그의 선거 캠페인 구호는 링컨으로부터 빌린 것이었다. 취임 후 그의 금융위기 대처 방식을 놓고는 루스벨트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1930년대 이래 미국 사회의 가장 큰 난제 중 하나였던 건강보험 개혁 입법화에 성공함으로써 오바마는 훗날 이들과 나란히 견줄 만한 역사적 인물로 올라서게 됐다. 이번에 통과된 법안은 찬반(贊反)을 떠나 미국인의 95%까지 의료보장 혜택 범위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사회보장 역사상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개혁 조치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워싱턴포스트(WP) 등 대다수 미국 언론들은 “오바마 정부 당대의 업적일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기억될 역사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오바마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린든 존슨 대통령의 계보를 잇는 미국 진보노선의 적자(嫡子)로 자리 매김될 전망이다. 30년대 초 대공황 위기 속에 등장한 루스벨트는 ‘뉴딜(New Deal)’ 정책을 통해 과감한 실업자 구제에 나섰고, 35년 사회보장법을 시행했다. 루스벨트는 국민건강보험제도 도입도 추진했으나 관련 단체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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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후 대통령 자리에 오른 존슨은 ‘위대한 사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지금까지 미국 건강보험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메디케어’(노령층에 대한 건보지원)와 ‘메디케이드’(저소득층·장애인 등에 대한 의료지원) 제도를 도입했다. 두 사람 모두 민주당이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의회 상황을 활용해 개혁을 일궈냈다는 점에서도 오바마와 같다. 이후 민주당 소속 지미 카터, 빌 클린턴 대통령 등이 건강보험 개혁 추진에 나섰지만 모두 실효성 있는 정책 도입에 실패했다. 특히 클린턴은 부인 힐러리를 백악관 내 건보개혁 태스크포스(TF) 책임자로 임명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반대 로비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극복하지 못해 의회 표결 절차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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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오바마는 1년여 동안 치밀한 계획과 시간표 아래 건보 개혁에 ‘올인’했다. 지지 여론 확산을 위한 홍보전, 반대세력에 대한 양보와 설득, 그리고 막후 협상, 이후 세몰이와 정면돌파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을 직접 관장했다. 뉴스위크는 오바마 성공의 요인으로 “뛰어난 말솜씨, 훌륭한 연출과 타이밍 감각, 워싱턴 정가에 문외한이어서 오히려 저돌적일 수 있었던 점” 등을 꼽았다.

하원에서 법안이 통과됐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공화당이 집권하고 있는 버지니아·플로리다·사우스캐롤라이나 3개 주 법무장관들은 이날 “모든 국민이 보험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며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될 경우 건보 개혁 문제는 ‘정치적 논쟁’에서 ‘법적 분쟁’으로 번지게 된다.

오바마는 이에 맞서 ‘정면 대결’을 준비 중이다. 이번 개혁안으로 혜택을 보게 될 사람들을 상대로 직접 ‘대국민 설득전’에 나선다는 복안이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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