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이야기꾼 - 무협 2.0 ② 의사 작가 한백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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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20년을 더 매달려 100권 남짓한 무협소설을 완성하겠다는 작가 한백림. [변선구 기자]

모두 11부작 100권(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첫 책 『무당마검』(파피루스)이 출간된 지 만 7년이 돼가는데 현재 3부 『천잠비룡포』(청어람)가 마무리 단계이다. 이 대작을 쓰는 작가는 뜻밖에 젊다. 한백림(30·본명 임대환),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수련의다. 전업작가가 아닌 만큼 한 달에 한 권 만나기 힘들다. 보통 새벽 6시에 출근해 오후 10시에 일이 끝나는 강행군이니 집필 속도가 느릴 수밖에. 21일 오후 비번임에도 잔무를 처리하러 나왔다는 그를 병원에서 만났다.

무협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물으니 특이한 답이 돌아왔다.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느라 논술을 공부하게 됐는데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을 읽고 쓰다 보니 재미있는 글에 대한 갈증이 커지면서 “재미가 최고”인 무협소설을 직접 끼적이기 시작했단다. 아무리 대중소설이라 해도 엄청난 대작을 중학생 때, 그러니까 1994~95년에 구상했다니 대단하다. 살짝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고 1때 썼던 『무당마검』 초고를 보여줄 수 있다고 정색을 한다.

그의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특이하다. 우선 주인공이 모두 11명이다. 각각 별도 이야기를 끌어가다 막판에 ‘악의 축’인 팔황과 대결한다는 구조다. 일종의 열전(列傳) 형식이면서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그러니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에 카메오처럼 등장하는 영웅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왜 천하제일인의 권선징악이라는 무협소설의 기존 틀을 깨고 그룹을 전면에 내세웠을까.

“수능시험 전국 1등은 매년 나오잖아요. 말하자면 외계인 같은 친구들이 해마다 나오는 거죠. 작품 배경이 되는 당시 명나라 인구가 1억 명에 육박하는데 고금유일 천하무적이란 주인공은 비현실적이다 싶어 주인공 그룹을 만들었죠.”

판타지처럼 가공의 시공간이 아니라 14세기 말~15세기 초 중국 명나라가 배경임을 분명히 한 점도 여느 창작무협에서 보기 드문 그만의 특징이다. 요즘으로 치면 ‘팩션’이랄까. 이를 위해 제자백가류를 비롯해 중국관련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자료조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문체다. 특유의 짧은 문장은 특히 전쟁 묘사에서 힘을 발휘해 전장의 숨가쁜 숨소리와 땀 냄새가 느껴질 정도다.

‘“적이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단운룡은 낯선 자다. 그의 모습은 이 땅을 살아가는 그 누구와도 달랐다. 처처처처척! 반응은 빨랐다. 추격자들 일부가 먼저 창칼을 겨눠왔다. 익숙한 아창족 호철도가 사나운 칼빛으로 눈앞을 어지럽혔다.’ 이런 식이다. 여기에 무(武)가 스러진 시대를 전망하고, 보통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진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겹쳐져 그의 글은 무협소설을 뛰어넘는 울림이 있다.

학부 시절엔 록 밴드며 축구동아리에도 활동했다는 이 젊은 재주꾼. 교육자였던 외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국문학 교수가 된 논술선생님이 문학적 스승이라는 그는 쉰 쯤에 전작이 완결될 것이라 했다. 변호사인 부친이 “사람 살리는 일을 하는 의사가 흥미 위주의 소설을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못마땅해 한다지만 평생 진료와 집필을 병행할 계획이란다. 그러면서 작은 반란을 꿈꿨다.

“새로운 독자층을 개척하기 위해 의학소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전염병을 소재로 한 3부작인데 대강의 스토리는 이미 만들었어요.”

의대 과정에서 들은 한의학 수업이 무협소설 집필에 도움이 됐다는 그이고 보면, 어쩌면 우린 장차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로빈 쿡처럼 전문성에 바탕을 둔 소설가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김성희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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