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무상급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9면

19세기 초 영국군 장교들은 사병들보다 키가 족히 머리 하나씩 컸다. 유전자 때문이 아니다. 그저 어릴 때부터 제대로 먹고 자랄 수 있는 계층에 속했던 덕분이다. 왕립사관학교에 입학하는 14세 무렵 이미 상류층 소년의 평균 신장은 해군에 입대하는 같은 연령대의 노동자 계층 소년보다 30㎝나 컸다고 한다. 자기보다 열등한 이를 ‘낮춰 본다(look down on)’는 영어 표현이 여기서 비롯됐단 설이 있다.

20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변변히 못 먹고 자란 탈북 남자 청소년들의 평균 신장이 남한의 또래보다 13.5㎝가량 작다는 검진 결과가 지난달 나왔다.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리는 등 건강도 좋지 않은 걸로 나타났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끼린 별 차이가 없을까? 불행히도 아니다. 월 소득 300만원 이상과 100만원 미만 가정의 남자 청소년들을 비교했더니 후자가 평균 7.4㎝ 작았다(2004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 게다가 가난한 아이들은 과체중과 빈혈을 겪는 비율도 훨씬 높다. 라면·과자처럼 열량만 높고 영양은 빵점인 정크 푸드로 배를 채우기 일쑤라서다.

이런 아이들에게 학교 급식은 하루 중 유일하게 균형 잡힌 식사일 공산이 크다. 따라서 급식의 질을 높이는 거야말로 빈곤층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이 9000만 유로를 투입해 지난해 하반기부터 학교에서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공짜로 나눠주기 시작한 이유다. 고소득층이야 집에서도 얼마든 먹일 수 있지만 저소득층 자녀는 일일 최소 권장량(400g)조차 채우기 힘들어서다. 이들 국가의 무상급식 비율은 30%대다. 하지만 이를 높이기보단 예산이 생기면 과일·야채 지급량을 늘린다는 게 그네들 계획이다. 부잣집 애들까지 공짜 급식 주자는 우리 야당과는 접근법이 판이하다.

최근 정부와 여당이 무상급식 비율을 30% 가까이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만약 여윳돈이 더 있다면 빈곤층 아이들의 방학 중 끼니 해결에 먼저 쓰는 게 맞다. 하루 3000원짜리 식권 한 장 주는 걸론 결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학기 중 아침 급식도 절실하다. 한발 더 나아가 유럽처럼 과일·야채까지 챙겨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생색 내기에만 바쁜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생각해봤느냐고. 그들의 키를 쑥쑥 키워줄 마음이 있긴 한 거냐고.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