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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를 다지자] 88. 엄마가 해주는 숙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매년 여름이면 유명 동.식물원은 여름방학 숙제를 미처 하지 못한 초등학생과 학부모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그러나 정작 동.식물의 특징을 기록하는 사람은 학생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동.식물원에서 주는 유인물만 챙긴 뒤 쏜살같이 놀이공원 등으로 직행하는 학부모도 상당히 많다.

또 방학 중 단골 과제인 '가족신문' 도 부모와 자녀가 함께 만들게 돼 있으나 제출한 것을 보면 전문가가 아니면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작품이 적지 않다. 이쯤 되면 숙제는 학생의 몫이 아니라 학부모의 '일' 이 돼 버린다.

언제부터인가 학생이 할 일을 학부모가 대신하고, 교사의 영역조차 학부모가 쉽게 관여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어떤 초등학교 학부모에게서 "학교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선거운동을 도와 아들을 임원에 당선시켰다" 는 자랑을 들은 적이 있다.

상급학교로 진학해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모 고교의 담임선생님에게 어느날 아침 학부모가 전화를 걸어 왔다. 그 분은 "내 아들이 지각을 좀 하더라도 야단치지 말아달라" 며 변명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 학생은 상습 지각생이어서 교육 차원에서 지도를 해야 했지만 학부모는 "아침부터 꾸지람을 들으면 공부에 지장이 있다" 며 그렇게 요구했다는 것이다.

요즘 학부모들은 학생 생활지도에 대한 교사의 권위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교사들이 학생들의 지각이나 결석 혹은 흡연 문제로 학부모에게 전화를 하면, 대부분은 '내 자식이 그럴 리 없다' 는 식으로 자녀를 맹목적으로 감싸기 일쑤다.

지나치게 많거나 어려운 숙제가 학부모에게 학생의 일을 대신케 하고, 그런 일들이 쌓여 학부모가 간섭하지 않아야 할 교육의 본질적인 부분에까지 관여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런 다음 개선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원희 <경복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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