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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티브X·앱스토어 규제, 디지털 쇄국주의 망령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8호 34면

1853년 7월 8일.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네 척의 군함이 에도만(현재의 도쿄만)에 나타났다. 무력시위를 앞세워 개항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포함외교였다. 이듬해 미국과 일본은 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페리 함대의 기함은 2450t 크기의 외륜 증기선인 서스케해나(Susquehana)였다. 목재가 썩지 않게 콜타르 칠을 해 검은색으로 보였다. 일본인들은 이를 ‘구로후네(黑船)’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당시 일본의 주력함은 100~200t에 불과했다. 흑선은 지금으로 치면 10만t급 미 해군 항공모함이 몰려온 것과 비슷한 압박감을 줬을 것이다.

김창우 칼럼

이 배를 보고 ‘충격과 공포’를 느꼈던 젊은이 중의 하나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하지만 그는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조그만 어선을 훔쳐 타고 흑선에 접근한다. 승선을 거절당해 육지로 돌아온 요시다는 몇 년간 감옥에서 지내야 했지만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그가 낙향해 키워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의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을 일으켜 일본 근대화를 이끌었다.

2009년 11월 28일. 날씬한 스마트폰 하나가 한국에 선을 보였다. 애플의 아이폰이다. 가로 6㎝, 세로 12㎝에 무게 135g에 불과한 아이폰은 석 달 만에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을 바꿔놨다. 휴대전화는 음성 통화를 하는 도구에서 음악을 듣고, 게임을 즐기고, 웹서핑을 하는 손 안의 컴퓨터로 진화했다. KT에 따르면 아이폰 판매량은 40만 대를 넘었다. 월평균 무선 데이터 사용량은 122배로 늘었다. 옴니아·모토로라 등도 관심을 끌면서 스마트폰 이용자가 1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한국 인터넷 환경은 모바일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의 움직임은 요시다와는 반대다. 지난 몇 년간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어떻게든 새로운 서비스 도입을 억누르려고만 했다. 휴대전화에는 한국형 무선인터넷 플랫폼인 위피(WIPI)를 의무적으로 탑재하도록 했다. 아이폰은 출시 후 1년이 넘도록 IT 강국이라는 한국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초고속인터넷 인프라를 갖추고도 인터넷전화(VoIP)와 인터넷TV(IPTV) 활성화를 최대한 미뤘다. 전화 사업자와 지상파 방송사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몇 가지는 해결됐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당장 스마트폰에서 외국업체의 내비게이션 프로그램을 사용하거나 앱스토어에서 모바일 게임을 내려받는 것은 국내 규정 때문에 안 된다.

액티브X 플러그인으로 떡칠한 인터넷도 여전히 문제다. 웹브라우저에 내장된 공인인증서 보안 기능 대신 마이크로소프트(MS)의 액티브X를 통해 백신, 방화벽,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 등을 설치하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이 때문에 스마트폰으로는 인터넷 뱅킹이나 온라인 쇼핑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전문가들은 PC에 이어 스마트폰에서도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진 ‘디지털 쇄국주의’를 고집하느냐고 탄식한다.

흑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개항한 일본은 재빨리 서양식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22년 후 조선 침략에 나섰다. 1875년 9월 20일 일본의 군함인 운요(雲揚)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불법으로 영해를 침입한 이 배에 조선군이 포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초지진을 함포 사격으로 파괴하고 영종진을 공격했다. 조선군은 전사자 35명에 16명이 포로로 잡히고 대포 35문과 화승총 130여 정도 빼앗겼다. 일본군의 피해는 경상자 2명. 그럼에도 일본은 책임을 조선에 돌렸다. 이듬해 강화도에서 조·일 수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식민지화의 길을 열었다. 운요호는 구경 16㎝와 14㎝인 포 1문씩을 실은 245t 크기의 증기 범선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당시 화강암을 40㎝나 관통한다는 대장군전을 갖춘 판옥선으로 일본 함대를 무찔렀던 조선 수군이다. 그런데 300년 후에는 조막만 한 포함 한 척에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쇄국주의의 결말은 이처럼 참혹하다.

역설적이게도 100년 전 개항을 통해 아시아의 패권을 잡은 일본은 최근 전자와 통신 분야에서 쇄국주의의 길을 걸었다. 대륙과 동떨어져 독자적으로 진화한 갈라파고스섬 동물들처럼 최고의 기술을 갖추고도 국내 시장에만 집중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은 이 틈을 파고들어 TV와 휴대전화 시장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다. 하드웨어(HW)는 갖춘 셈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콘텐트와 소프트웨어(SW), 통신 서비스에서 ‘우리 식대로’만 고집하다가는 ‘디지털 갈라파고스’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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