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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불란의 환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8호 35면

“한마음, 한뜻으로 일사불란하게.” 교장 선생님 훈화, 부대장 훈시에서 늘 듣던 말이다. 자기 이득만 내세워 다투지 말고 똘똘 뭉치자는 뜻에선 옳지만, 경영의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경영은 줄다리기 시합이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데 무작정 한 방향으로만 가다가는 함께 망하기 딱 좋다. 경영은 교련 검열도 아니다. 줄 맞춰 세워 놓으면 높은 분 보시기에 뿌듯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남남끼리 모여 사는 세상에서 생각도 속사정도 다른 어른들이 일편단심으로 뭉치길 바라기도 어렵다. 하물며 임기가 빤한 경영자가 (혹은 장관, 심지어 통치권자마저) 무한정 책임져 줄 것 같지도 않은데 죽기 살기로 따를 사람도 많지 않다.

그렇다고 되는 일 하나 없는 답답한 세상을 멍하니 바라만 볼 수도 없다. 아무튼 조직의 힘을 모아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같은 일을 반복하거나 여기저기 일들이 엉키는 혼선을 막을 수 있다. 해결책을 생각해 보자. 다양성, 고민, 소통, 합의, 포용…. 좋은 말들은 너무나 많다. 그럴듯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면 제법 폼도 살고 ‘열린 경영’이란 칭송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좋은 말의 뒤에는 트집과 뒷다리 잡기도 많아 자기 임기나 대충 때우고 몸값이나 올리려는 얄팍한 경영자의 면피용에 더 적합하다. 제대로 된 경영자라면 회사의 미래를 위해 꼭 할 일을 정해 실행해야 한다.

구체적인 예를 생각해 보자. 무선 인터넷 시대가 왔는가? 그래서 휴대전화든 관련 서비스든 스마트폰에만 맞춰야 할까? 전기자동차는 어떤가? 수소전지로 가야 할까, 충전식으로 가야 할까? 실은 아무도 모른다. 관련 기술이 어떻게 진보할지도 모르고, 관련 업체들의 이합집산에 따라서 기술 표준도 늘 진화한다. 전혀 새로운 대체 기술이나 제품이 나올 수도 있다. 금광 개발 붐에 청바지 장사가 돈을 벌고 데이터 전송·공유가 늘면서 외장 하드나 메모리 카드가 돈을 벌듯이 주변 제품과 기술이 더 뜰 수도 있다.

경영자로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고 여러 가지 대안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 정말 중요한 기술이면 복수(複數)의 사업부에 맡겨 경쟁과 보완을 꾀할 수도 있다. 물론 쉽지 않다. 돈과 인력은 뻔한데 여기저기 건드리다 죽도 밥도 안 될까 걱정이다. 속 좁은 사람들은 자기만 정답이라며 싸워댄다. ‘비전이 명확하지 않다’ ‘혁신의 의지가 없다’…. 말 많은 분들이 나서기 시작한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관료적 주장도 나온다.

불확실한 미래에 다양한 대안을 준비하는 일은 과학보다 예술에 가깝다. 한 회사에서 스마트폰에 미래가 있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이 같이 일하기가 쉬울 리가 없다. 양쪽 다 ‘경영자는 우리 편’이라고 믿게 만들기는 더욱 어렵다. 눈앞의 성과만 독촉할 수도 없지만, 공상과학 같은 연구를 마냥 허용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회사의 전략 방침만 고집하며 현장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무시할 수도 없다. 이른바 ‘건설적 모호함’이고, 밸런싱(balancing)의 지혜다. 정답 찾기에만 길든 서생들에겐 어려운 일이다.

꼭 해야 할 사업이면 경영자가 직접 나설 수 있다. 책임지고 승부를 걸어 보는 것이다. 자기가 뜨려고 이것저것 저지르는 영악한 (혹은 미련한) 수하들은 무작정 힘을 실어 달라고 보채고, 껍데기만 훌륭한 유행 아이템도 곳곳에 널려 있으니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선택과 집중의 실력이다. 이렇게 보면 정파 간 이견, 당내 갈등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미련한 집중을 바란다면 저열한 다툼이 되고, 공유된 가치에 기반한 헌신이면 다양한 기회로 실현된다. 결국 경영자의 역량이다. 교장 선생님, 부대장의 ‘일사불란’도 속뜻은 ‘가치와 헌신’이었을 것이다. 선거의 계절을 맞아 한번 생각해 볼 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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