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전문가의 시대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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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절이면서 절 같지 않은 독특한 양식의 진천 보탑사. 본당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늦여름 햇살이 아직 뜨겁다. 높다란 천장에 매달려 단청 칠하는 노인의 손길이 바쁘다. 연신 떨어지는 염료방울에 눈을 비비면서도 그의 손길은 쉴 줄 모른다.

가쁜 숨, 구슬땀, 때론 침식도 거른 채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저러길 벌써 몇 달째 몸무게도 빠지고 많이 수척해졌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좀 쉬라고 권해보지만 막무가내. "뭘 쉬어, 이렇게 신나는 일을!" 영감님은 정말이지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작심삼일, 싫은 일이라면 저렇게 신나게 할 순 없을 것이다.

해가 뉘엿거리는 어느 날 오후 이윽고 완성, 붓으로 마지막 점을 찍는 순간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는다. 그리곤 멀거니 사방을 둘러보며 혼자 뭐라 독백한다. 고충, 인내, 만족, 완성에의 긍지….

그 순간의 심경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으랴. 착잡한 표정, 차라리 허허로운 그런 웃음일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가슴이 벅찼을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넋잃은 사람처럼 앉아 있더니 그제사 천천히 일어나 둘러선 사람들과 수인사를 나누곤 봉투 하나를 현장 감독에게 건넨다. "공사하고 남은 돈일세.

평생을 단청쟁이로 일하면서 나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보긴 이번이 처음일세. 내 단청을 나도 한번 해봤으니 원 풀었네. 여한이 없어. 평생의 한이 풀렸는걸. 김감독, 고맙네. 나를 믿고 맡겨줬으니. " 대충 이런 내용으로 더듬거리곤 뒤도 보지 않고 산을 내려가버렸다.

현장 사람들은 얼이 빠진 듯 서로 얼굴만 쳐다본다. 축하고 감사고 정중히 인사 한 마디 드릴 겨를도 없었다. 영감님이 산모롱이를 돌아 사라진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려 봉투를 열어본다. 1천8백만원의 거금이 들어 있었다. 재료비만 쓰고 자기 몫으로 남은 돈은 한푼 손대지 않고 돌려준 것이다. "이럴 수가□ 그러고도 고맙다니!"

향년 78세, 단청공 이 석성. 우리네 소시민들 생각엔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넉넉한 형편이 결코 아닐텐데. 하지만 난 그 늙은 장인의 심경을 이해할 것 같다. 모두가 전문가인 척하는 한국적 풍토에서 전적으로 '믿고 맡긴다' 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노인 마음대로 하십시오. " 그리곤 일이 끝날 때까지 누구도 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마디 않고 기다려 준 것. 노인은 그래서 감격한 것이다.

우리는 전문가의 말을 잘 믿으려들지 않는 묘한 습성이 있다. 자기도 그 정도는 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건 농경시대부터 모든 걸 제 손으로 해 왔다는 자족의식에서 비롯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참견을 하고 나선다.

가끔 병원에서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의사 말은 안 믿고 자기 생각대로, 혹은 돌팔이 꾐에 빠져 병원치료를 안 받다가 사경이 돼서야 다시 돌아온다. 산속에서 10년 수도한 도사라나? 1백년을 한들 그게 어찌 전문가냐□

길가에 집을 못짓는 것도 그래서다. 까짓 길가는 사람 참견쯤이야 무시한다 치자. 문제는 집 주인의 간섭이다. 중간에 또 설계 변경, 헐고 짓고, 아주 기형적인 집이 된다. 물론 건축비도 더 든다. 공기는 물론이고. 이러고 끝났으니 불만이 나올 수밖에. 왜 이 모양이냐. 비싸냐□ 온갖 험담 다한다.

의사든 집이든 단청이든 맡기기 전에 잘 생각해봐야 한다. 이모저모 뜯어보고 "이 사람이다!" 하고 결정이 되면 그 때부터는 그의 전문지식 기술을 믿고 맡겨야 한다. 그리고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이 건 상식이다.

이 간단한 상식이 안통하는 게 우리 사회다. 정책이 표류하고 배가 산비탈에 걸터 앉은 꼴이 된 게 어디 한둘인가. 신중하고 엄격한 검증 절차를 거쳐 이 사람이라고 낙점했으면 전적으로 믿고 맡기고,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평생을 단청일만 한 노인이다. 밤 놓아라, 콩 놓아라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으면 마음대로 하라는 그 말에 그렇게 감동했을까. 그리곤 참고 기다려 준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긴말 할 것 없다. 지금은 전문가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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