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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백척간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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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선의 거상 임상옥이 인삼을 바리바리 싣고 중국에 간다. 지금으로 보면 국제무역이다. 그런데 중국 상인들이 담합을 한다. 값을 후려치기 위해 ‘불매동맹’을 맺은 것이다. 자칫 빈털터리가 될 절체절명의 위기다. 때마침 북경에 머물던 추사 김정희를 찾아간다. “지금 어떤 사람이 백척간두에 올라서 있다. 오도가도 할 수 없이 죽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내려올 수 있겠나?” 그러자 추사는 “내려올 수 없다”고 답한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의 한 대목이다.

당혹스러워하는 임상옥에게 추사는 일필휘지로 한 구절 내민다. “백척간두진일보 시방세계현전신(百尺竿頭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 의아해하는 임상옥에게 추사는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라고 말한다. 문득 깨달은 임상옥은 가져온 인삼을 모아놓고 불을 지른다. 그러자 중국 상인들이 말리며, 제시한 가격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백척간두…’는 원래 중국 선종의 큰스님 남전보원(南泉普願)의 제자 장사경잠(長沙景岑)의 게송(偈頌)으로 알려져 있다. ‘백척간두에 주저앉은 사람이여, 비록 도를 깨쳤지만 참다움에 미치지 못하니, 거기서 한 걸음 더 내디뎌야, 시방세계 그대로 부처님의 온몸이다’는 내용이다. 지극히 노력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화두는 위기에 처한 기업뿐 아니라 정치권에서 종종 회자된다. 묘하게도 춘삼월(春三月)에 많다. 지난해 3월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를 앞두고 당시 심경을 ‘백척간두진일보’라고 했다. 정동영 의원이 고향 지역구에서 출마의사를 밝혔을 때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한 발짝 더 내디디면 살 수 있다는 뜻”이라는 등 해석이 분분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도 3년 전 춘삼월에 봉은사를 찾아 “천길 낭떠러지를 떨어지는데, 풀포기 하나 잡으려고 안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며 이 화두를 던졌다.

이번에는 장신썬(張<946B>森) 주한 중국대사 내정자가 엊그제 중국 상하이에서 기자들과 만나 앞으로의 한·중관계를 ‘백척간두 경상일루(百尺竿頭 更上一樓)’라고 했다. 현재 ‘높은 경지’의 관계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백척간두’에서 ‘위험’을 연상하는 한국과 그만큼의 ‘적공(積功)’을 떠올리는 중국의 차이인가. 하지만 ‘끝없는 변화의 흐름(FLUX)’ 속에서 멈춤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는 측면에서 결국 같은 의미일 것이다.

박종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