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반의 반쪽 여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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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87년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의 길이 열리자 최대의 관심사는 양김(兩金)의 후보 단일화였다.

이철승(李哲承)씨는 "양김이 단일화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며 단일화에 부정적이었지만, 많은 사람은 "민주화가 될 때까지는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협력하겠다" 던 두 金씨의 다짐을 믿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순진한 기대였다.

*** 일부의견 듣고 "국민의 뜻"

단일화 논의가 한창일 때 DJ는 느닷없이 "국민에게 물어보겠다" 며 고향방문에 나선다. 미국 망명에서 귀국한 뒤 첫 호남행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겪고 군사독재의 탄압에 억눌려 있던 광주시민들의 울분은 DJ를 맞아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당시 동행 취재했던 필자는 지금도 그때의 열광적 분위기를 잊을 수 없다.

귀경길에 호남선 새마을호가 목포를 출발하자 DJ는 기자간담회를 자청, "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확인했다" 고 선언했다. 그 짧은 한 마디에 기자들은 일제히 송정리역에서 하차했고 그날 석간신문엔 'DJ 사실상 출마선언' 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이에 자극받은 YS는 곧바로 부산 수영만으로 달려갔다. 줄잡아 1백만명이 모였다. 대중집회로는 그때까지 최대 규모였다. 그 어마어마한 인파가 뿜어내는 열기는 또다른 '민심' 을 대변하고 있었다.

'불출마 선언' '후보 단일화 약속' 등 대국민 약속과 기대라는 족쇄를 양김은 각각 자신들의 지역기반 민심을 동원해 단숨에 풀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체 국민의 반쪽도 안되는 민심이었음을 그 뒤 선거결과가 입증해줬다. 양김은 자신들이 타도대상으로 삼았던 군부정권의 연장을 도와주었을 뿐이었다. 그때의 실망감.분노는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 와서 양김의 단일화 약속 위배를 탓하자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 달콤한 여론만 골라 목표 쟁취의 수단으로 삼는 행태가 오늘에도 똑같이 되풀이되는 점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지난 3월 '국민과의 대화' 에 이어 최근 뉴스위크 한국판에 실린 인터뷰에서 언론사 세무조사와 신문고시 부활 등 일련의 신문정책과 관련, "국민의 80%, 언론종사자 90%가 언론개혁을 원하고 있다" 고 정당성을 강조했다. 언론이 개혁돼야 한다는 점은 백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문제는 개혁의 방향과 내용, 그리고 주체다.

그러한 것은 거두절미한 채 언론개혁을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고 답하는 게 당연하다. 그 답변 속에는 정부가 추진하는 것과 같은 신문경영의 투명성이라든지, 신문시장의 정화 필요성을 제기하는 견해도 들어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방송의 편파적 보도 및 선정성을 포함, 언론 전반의 질적 개선을 요구하는 견해는 물론 정부의 언론간섭에 대한 불만도 내포돼 있을 수 있다.

만약 정부의 신문개입 정책에 집권층의 의도와 반(反)시장경제적 관점, 그리고 그 결과가 가져올 수 있는 언론자유 침해의 소지 등을 다각적으로 제시한 뒤 그같은 조치에 대한 국민여론을 물었다면 결과가 어떠할까. 부정적인 견해가 압도적일 것이다.

*** 나치시대식 선전술 연상

정부 주도의 언론개혁 논의에선 신문의 일부 부정적 측면만 부각되고 신문개입에 따른 독소는 깡그리 외면되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의 의견을 여론의 전부인 양 호도하는 행태야말로 일부 지역정서를 '국민의 뜻' 이라고 표방했던 87년식 정치신화와 다를 바 없다.

특정신문을 몰아치는 일방적 보도행각은 나치시대의 선전술을 연상시킨다. 히틀러는 "끈기있는 선전은 천당을 지옥으로, 지옥을 천당으로 만들 수 있다" (『나의 투쟁』)고 설파했다.

'빅3신문 죽이기' 에서 연출되는 작금의 행태에서 그런 흔적을 엿보게 된다.

여론정치의 진정한 의미는 사회적 실체로서의 여론을 존중하는 데 있다. 어느 한쪽의 견해를 여론이라고 내세우거나 특정 집단을 동원해 목표한 방향으로 여론을 형성해 나가는 행위는 여론존중이 아닌 여론왜곡이요, 여론조작에 해당한다.

왜곡된 여론을 바탕으로 펼쳐진 정치는 왜곡된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87년의 정치신화가 민주화세력의 패배로 귀결된 경험이 바로 그에 대한 뼈아픈 교훈이 아니던가.

허남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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