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죽은 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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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2월 독일과 일본 사이에 작은 외교적 해프닝이 있었다.

독일의 쥐트도이체 차이퉁(SZ)이 발행하는 주간지 SZ 매거진 2월 23일자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사진을 게재했다. 나루히토(德仁)일본 왕세자 부부의 사진을 겉표지에 쓰면서 나루히토의 검은색 바지 한가운데 '중요한 부분' 에 노란 글씨로 'Tote Hose' (죽은 바지)라고 써 넣은 것이다.

이를 보도한 일본의 산케이(産經)신문이 이를 '실패' 라고 번역한 것으로 당시 도쿄발 연합뉴스 기사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우익신문인 산케이신문다운 '고상한' 번역이다. 여기서 '죽은 바지' 란 '남성불임' , 흔히 말하는 '고자' (鼓子)란 뜻이다.

당연히 일본에선 난리가 났다. '감히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지존인 덴노(天皇)의 후계자를 모욕하다니…' . 일본 외무성은 즉각 일본주재 독일대사를 불러 항의했고, 놀란 SZ측이 정중한 사과를 하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됐다.

1993년 마사코(雅子)왕세자비와 결혼한 나루히토는 아직 자식이 없어 그간 왕실은 물론 일본 국민의 애을 태웠다. 나루히토의 동생 후미히토(文仁)도 딸만 둘 있어 자칫하면 초대 진무(神武)에서 1백25대 현 아키히토(明仁)에 이르기까지 몇 안되는 여성 덴노가 나올 판이다.

특히 1999년 12월 마사코의 임신소식에 일본열도가 떠들썩했으나 결국 유산을 하자 이를 특종 보도한 아사히신문이 여론의 '몰매' 를 맞기도 했다. 성급한 보도와 이에 따른 언론의 추적이 유산의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 마사코가 이번엔 진짜 임신을 한 모양이다. 지난번 유산건도 있고 해서인지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지만 벌써 엔화가 치솟고 유아용품 메이커인 피존그룹의 주가가 급등했다고 한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왕세자비의 임신은 유아관련 산업의 매출을 10% 가량 늘려 일본 국내총생산을 0.1~0.2% 늘리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일본 사람들에겐 경사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주변국의 시선은 시큰둥하다 . 교과서 파동에다 지도급 인사들의 잇따른 망언으로 도무지 축하해줄 분위기가 아니다. 축하는커녕 일본의 우경화를 더욱 부채질할 수도 있는 마사코의 임신소식을 우려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일본이 지금처럼 이웃과 더불어 살기를 포기한다면 그들은 국제사회에서 영원히 '왕따' 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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