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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54. 20년만의 환율개혁

1980년 2월 말 신병현(申秉鉉) 한국은행 총재는 재무부와 한은 양자의 입장을 반영한 환율결정 시스템의 도입을 수락했다. 그러느라 새 환율제도의 시행이 한 달 이상 늦춰졌다.

나중에 한은의 양해를 받아내긴 했지만 사전에 중앙은행과의 합의 없이 환율제도를 바꾼 것은 정치적 혼란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해 8월 16일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하야했다. 보름 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취임했다.

새 환율제를 막상 시행해 보니 실세가 잘 안 나왔다. 한창 팽창경제를 추진할 때였다. 이 때문에 유동화한 환율을 다시 올리는 문제가 대두했다.

환율 조정은 그 때나 지금이나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의 사항이다.

'αSDR바스켓+β무역가중통화바스켓+P(α+β〓1, P:실세 반영을 위한 가중치)'

IMF측은 조금 복잡해 보이는 이 공식의 의미를 여기 저기 알아 보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도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이 없었다. 알 턱이 없었다.

어느 날 IMF측 인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자기가 만나 본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보라고 했다면서 "여러 나라의 환율제도를 접해 봤지만 이런 공식은 처음 본다" 고 말했다.

나는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고 털어 놓았다. 그러자 그가 놀라워했다. 나는 무슨 이론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며 "재무부와 한은간의 타협의 산물일 뿐" 이라고 말해 주었다. 사실 그랬다. 공식의 P는 재무장관과 한은 총재가 합의해서 임의로 결정하도록 돼 있었다.

그는 "참 좋은 아이디어" 라고 말했다. IMF도 개방과 외환 자유화가 안 돼 있는 나라의 외환시장이라는 게 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IMF도 이 공식을 공인했다.

당시 나의 참 의도는 단 한 가지였다. 정치권력의 환율에 대한 간섭을 어떻게든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사무관 시절 이래 20여년 동안 별러 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이후로 환율을 조정하기 위해 국무회의도 열지 않았고 대통령 결재도 받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 일이 성사된 것은 사심이 없었던 최 전 대통령이 안을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최광수(崔侊洙) 비서실장이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정치권력의 배제라는 속뜻까지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환율제도 하나 개혁하는 데 무려 20여년이 걸렸다. 개혁은 그렇게 지난한 것이다. 개혁이란 무엇보다 오랜 세월 꾸준히 매진해야 실현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개방과 자유화가 안 된 외환시장이란 사실상 있으나 마나한 것이었다.

이렇게 환율사에 한 페이지를 남기고 이듬해 나는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돌이켜보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하더라도 문제점이 있게 마련이다.

88년 흑자 반전 3년만에 1백40억 달러가 넘는 경상수지 흑자를 올린 배경엔 저평가된 환율이 있었다. 3저(低) 호황을 떠받친 한 축이 바로 저환율이었다.

저환율 상태가 지속되자 환율 공식상의 P(실세를 반영하기 위한 가중치)를 가지고 정부가 환율 조작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비정상적인 저환율을 너무 오랫동안 유지했던 것이 결국 화근이었다.

외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70년대 1차 오일 쇼크 때 돈을 꿔 쓰다 보니 재미가 들렸다. 그 재미에 은행이고 기업이고 닥치는 대로 단기 외자를 들여온 결과 단기 차입자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런 상황이 97년 말 IMF 관리체제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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